<과거 대구본당 터>
왜관으로 발길을 든 그 날은 습한 공기가 무겁게 몸을 짓누르는 정말이지 전형적인 대구날씨를 보여주는 날이었다. 종교가 아닌 학문으로 접하게 된 천주교 교리가 놀라운 자생력을 가지고 싹(1784년 한국천주교 창립/1831년 조선교구설정)을 틔웠지만 서울을 거쳐 대구까지 내려오기엔 힘이 많이 부쳤나 보다. 100년이 흐른 1885년 왜관 신나무골에 대구본당(계산성당의 전신)이 처음 세워졌고, 1911년 대구교구가 설정되었으니 말이다. 그 자취를 따라 떠나는 여행은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한참을 버려져 있었던 듯 성당 앞마당은 가꾸지 않은 풀들이 모나게 자라고 있었다. 이 곳의 방문은 2번째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지금보다는 첫 방문 때(그땐 분명 초가집이었다)가 훨씬 더 볼거리가 있었던 듯 한데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지금은 어느 곳에서도 사람의 손길을 느끼기 힘든 상황이었다. 대구대교구의 첫 본당이고, 대구, 전주, 부산교회의 시작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곳이 가진 의미는 그저 시간의 흐름에 날려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닐텐데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든다.
작은 방 2칸, 손바닥만한 대청마루가 모두인 이곳은 대구교구의 첫 사제였던 김보록(A chilleus. P. Robert)신부님이 3년간 기거했던 사제관이다. 신부님 이후 몇 분의 신부님들이 더 다녀가시며 10년간 사제관으로 이용했다. 사제관으로 사용하던 이곳의 앞쪽으로 신나무골 학당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2004년 9월 폭우가 쏟아지며 붕괴가 되었다고 한다. 복구를 계획하고 있는 듯 하지만 언제 마무리가 될지 알 수 없다.
빼꼼히 열린 문을 통해 보니 제대로 사용한 듯 작은 책상이 놓여져 있고, 뒤 쪽으로는 대구교회 관련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다. 보관상태... 너무 안타깝다. 2011년으로 100주년을 맞이한 대구대교구인데... 좀 더 신경써야 할 듯 하다.
<김보록(로베르)신부님 흉상>
무성하게 자란 풀 사이 김보록 신부님 흉상(최홍록 스테파노 作)이 있다. 프랑스인이었던 로베르신부님(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은 사제서품을 받고 1년 뒤 한국으로 향했다고 한다. 20대의 젊은 사제가 많은 것을 포기하고 찾은 한국의 시골마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대구 근교에서 추방되기를 몇 번, 겨우 이곳에 자리잡고 30년을 보냈다. 그 후에도 병으로 고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결국 타국에서 몸져 누워 지금까지 대구 땅에 머무르고 계신다(교구 성직자 묘지에 안장).
<신나무골 성지>
원래 대구본당이 있었던 신나무골 일대는 박해를 피해 떠나온 신자들의 교우촌이었다. 한티성지(팔공산, 33km)와 이곳을 오가며 신앙생활을 했던 그 옛날 신자들의 흔적이다. 한티의 첫 순교자였던 이선이(엘리사벳)의 묘가 1984년 한티에서 이곳으로 이장되고 신나무골 성역화 사업이 진행되었다.
대구본당은 지금의 계산성당으로 이어졌고, 그 이후 생긴 성당이 왜관 가실성당이다.
<왜관 가실성당>
신나무골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가실성당(전 낙산성당)은 한국의 아름다운 성당을 꼽으라면 세 손가락에 들어갈 만큼 작지만 명성이 자자한 성당이다. 하지만 경관만 아름답다고 해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은 아니지 않나. 대구대교구의 2번째 성당(1895년 설립)이면서 한국교회의 11번째 성당으로 과거의 모습을 지금까지 고스란히 남겨두어 그 의미는 더 크게 다가온다.
과거 우리의 신앙촌은 신앙의 선조들이 지켰다면 지금의 성당은 아이들이 지킨다?? ^^
휴일을 맞아 성당을 찾은 아이들의 모습이 평화로운 성당 마당과 너무도 잘 어우러진다. 바로 이런게 "하느님께서 보시기 좋은 모습"이 아닐까 싶다.
성당내부는 보물상자(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48호) 같다. 자그마한 본당 안에는 유럽의 성당들이 부럽지 않을만큼 유서있고, 의미가 담긴 성물들이 가득하다. 나무바닥에 나무기둥이 건물을 받쳐들고 있고, 제대와 감실, 십자고상까지 모두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제대 감실>
성체를 모시고 있는 감실은 '엠마오에서 만난 제자들'을 주제로 그리고 있는데 그 재료가 '칠보'라고 한다. 색이 짙고 선명한 감실은 '부활감실'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한 가지, 감실에 항상 켜져있어야 할 감실등(성체등)이 보이지 않는다. 감실과 조금 떨어져 있는 감실등은 세상을 바라볼 때 조금 거리를 두고 봐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기도 하다. 현재 십자가상(1964년)이 있는 곳에 원래는 안나상이 있었다고 한다.
감실의 등은 지금도 기름으로 불을 밝히고 있다. 편리한 전기를 두고 기름으로 불을 밝혀 80년을 이어온 성체등(전기로 바꾸었다가 다시 기름으로 바꾸었다)이다. 어찌 기름의 양을 조절하는지 모르겠지만 이 등의 기름을 채워넣는 것은 신부님의 업무 중 하나라 한다. 최근 생겨난 성당에서 제대 위 미사초를 파라핀 오일로 밝히는 것을 보긴 했지만 감실의 등을 이런 형태로 밝히는 건 처음이라서인지 굉장히 인상적이다.
<출처: 가실성당 홈페이지(http://www.gasil.kr/01_03_guide.html)>
가실성당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건물의 3면을 장식하고 있는 스테인드글라스이다. 종탑에 3개의 창이 있고, 출입문 쪽에 반달형의 창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주제로 하여 3개가 있다. 성당 안에서 보이는 사각형의 창 10개에는 '예수님의 삶'을 주제로 하여 밑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보면 된단다(7번째 창은 반대-위에서 아래로). 성당 안의 스테인드글라스는 2005년에 독일작가 에기노 와이너트가 제작했다.
동양화가 손숙희씨가 그림을 그린 십자가의 길 14처는 성당건립시 중국에서 들여온 액자에 담겨져 있다.
<주보성인 안나상>
가실성당의 주보성인인 안나상에는 어린 성모님이 함께 하신다. 성당을 지을 때 프랑스에서 들여온 성상으로 원래는 성당 중앙에 있었지만 지금은 옆쪽으로 조금 비켜있다.
오래된 성당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종탑과 종이다. 미사시간을 알려주고, 기도시간을 알려주는 종은 교회의 상징으로도 손색이 없다. 가실성당 역시 성당이 설립되었을 때 함께 만들어진 "안나의 종"은 지금도 왜관 일대에 울려퍼지고 있다. 종을 실제로 볼 수는 없지만 라틴어로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 한국 사막에서 외치는 소리처럼 내가 거룩한 구세주의 성당에서 설치되었다. .... '사막의 아름다움은 꽃처럼 싹틀 것이다'."
구사제관으로 이용되었던 건물은 어렴풋이 영화 <신부수업>에서 보았던 기억이 난다. 주일학교 아이들과 영화 주인공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행사를 준비하던 모습도 떠오르고... 정말 오래된 건물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지만 지금도 깔끔하게 잘 정돈되어 있다.
창틀에서 보이는 누군가의 재치... 유럽의 성당들을 보면 건축가나 미술가의 얼굴이 남아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도 이 성당을 지은 박도행(Victor Louis Poisnel,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그 재치에 한참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가실성당의 '가실'은 '아름다운 집'이라는 뜻이다. 처음 설립되었을 때엔 '가실성당'이었으나 일제시대 행정구역조정에서 강제로 '낙산성당'이 되었다가 2005년 본래의 이름 '가실'을 되찾았다. 낙산지역이 한국전쟁으로 초토화되고도 가실성당이 이대로 남아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전쟁당시 군사병원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란다. 아군과 적군의 구별없이 다친 사람들은 모조리 이곳으로 와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하니 성당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 때에도 사랑과 평화를 실천하는 터전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듯 하다.
언뜻보면 명동성당이나 계산성당, 정동성당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데 당연한 것이 당시 대부분의 성당 건물(신고딕 양식을 띤 로마네스크 양식)들은 박도행 신부가 설계했다고 한다. 벽돌도 이곳에서 직접 구워 하나하나 쌓아나갔으며 구워진 벽돌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성한 것들만 골랐으니 그 정성과 노력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성당을 돌아 구사제관으로 향하면 산길로 이어진 산책길이 있다. 십자가의 길로 이어진 산책길을 천천히 돌아보면 가실성당이 가진 매력을 한 껏 더 느낄 수 있다.
■ 가실성당 찾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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