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가 가진 고유한 스토리가 있고, 그 스토리가 감성 깊숙한 곳을 건드릴 수 있다면 어디든 멋진 테마파크가 될 수 있다. 그런 시각으로 본다면 하동 평사리 최참판댁은 최고의 테마파크로 어느 곳에도 뒤지지 않겠다. 다이나믹한 볼거리와 체험거리는 없지만 한 여류작가가 일생에 더 이상의 작품은 없다고 칭할만큼 필생의 업적이 된 소설의 배경지니 말이다. 살짜기 그 소설 속으로 들어가본다.
▲ 문간채(행랑채로 들어서는 문)
급한 마음에 정문까지 가지도 못하고 옆문으로 들어선다.
당시 생활상을 생각하면 주인네들이 오가는 길이 아니라 종들이 사용하던 전용 문 정도 되겠다. 그래서인지 들어서니 하인들이 생활한 행랑채와 주방, 외양간 등이 연결되어 있다. 만석꾼의 집이라서인지 하인들의 생활공간도 무지 넓다.
▲ 별당(주인공 서희가 머물렀던 곳)
시작부터가 파란만장했던 최참판댁의 무남독녀 최서희가 생활했던 별당이다. 원래는 어머니가 사용했던 곳이나 어머니가 떠나고 난 뒤 유모와 함께 이곳에서 지냈다. 사랑을 꽃피우기 위해 딸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 그 어머니에 대한 증오로 흔들리다 피살당한 아버지. 유일하게 금이야 옥이야 하며 보살피던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을 것이다.
노란 저고리를 입은 어여쁜 소녀가 계절마다 피어나는 꽃나무들을 보며 천진난만하게 뛰어다녀야 할 곳인데 그 모든 것을 마음으로 삼키고 참았어야 할 소녀의 모습이 어른거려 가슴이 따끔하다.
나를 버린 여자의 아이가 썩 이뻐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혼자남은 딸아이는 언제나 마음을 아리게 했겠지.
차마 가까이 다가가 보진 못하고 담너머 흘끗보다 눈이라도 마주칠까 이내 눈길을 거두며 뒤돌아서는 아버지의 뒷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드라마 촬영, 영화 촬영지로 지금도 활용되는 터라 디테일이 살아있다. 누군가 짐을 풀어놓고 이곳에서 생활해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삶의 흔적이 녹아있는 것 같다. 드라마 [토지] 뿐만 아니라 영화 [관상], [군도], 드라마 [구가의 서], [꽃들의 전쟁]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극들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유일하게 관상만 봤는데 어디쯤이 배경으로 나왔는지 도통 모르겠다.
▲ 사당(제사를 지내던 곳)
▲ 안채
안채와 마당의 크기로 최참판댁이 당시 얼마나 위세를 떨쳤는지 체감할 수 있다.
아흔아홉칸...
임금이 백칸짜리 건물에 머무르니 감히 똑같을 순 없고, 한 채를 줄여 당시 만석꾼이라 불리던 양반네들의 집들은 아흔아홉칸으로 지었다고 한다. 아흔아홉칸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지만 일단 무지하게 넓다는 사실! ^^
안채를 휘감아 돌아가면 비밀의 숲이 나온다.
곧게 서 있는 대나무의 소근거림을 들으며 숲에 들어서면 또 하나의 사당이 나온다. 조상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 같다. 드라마촬영장으로 만들었으니 작은 건물 하나 그냥 만든게 없다. 드라마에서 나왔던 장면들을 전시하면서 설명한다. <토지>를 읽지 않았어도 그 설명들을 보면 대략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 충분히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
▲ 초당(서희의 아버지가 자주 머물렀던 곳)
길지 않은 인생을 고독하게 보냈을 최치수에게도 숨구멍은 있었다.
시끄러웠을 세상사를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던 초당은 책도 읽고, 시도 짓던 곳이다. 하지만 완전히 벗어나진 못하고 집안을 내려다보았을 최치수, 아니 한 가문의 당주 자리이다. 이곳을 참 좋아했었나 보다. 한참을 이곳에서 지내며 내려오지 않았던 날도 있었다고 한다.
그. 러. 나.
안타깝게도 이곳은 최치수의 마지막 거처가 되었다. 그날 이후 최씨 가문의 당주는 안뜰로 들어올 수 없었고, 세찬 태풍이 최참판댁에 휘몰아친다.
▲ 뒤채
부모를 잃은 서희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이곳에 자리를 잡고 급기야 재산까지 약탈해버린 조준구가 머물렀다는 곳.
이곳에서 최치수의 살해를 계획하고 최씨 가문의 몰락을 위해 갖은 술수를 도모했다. 사랑채까지 꽤차고 앉았지만 악인은 최종 승자가 될 수 없었다. 결국 서희에 의해 모든 재산을 탕진했다.
▲ 사랑채(최치수의 공간)
최참판댁 건물들 가운데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사랑채는 직접 올라가 평사리 마을을 내려다볼 수 있어 인기만점인 곳이다. 아~ 메인 건물답게 잘 꾸며놓았구나 하고 사진을 찍었는데 살짝 움직이는 실루엣~ 사람이었다. 실제로 이곳에 계시면서 때때로 최참판댁에 대한 설명도 해주시는 분이란다. 너무 깜짝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드라마촬영장으로 만들었다는데 나무의 결이 100년은 족히 지난 듯 보인다. 이런 결이 나는 너무 좋다. 만들어진 곳이라는 걸 몰랐다면 깜빡 속을 뻔 했다. 진짜 최참판네가 살았던 곳이라고... 지붕의 기개가 하늘로 솟아오를 것 같다.
무엇보다 환상적이었던 것은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평사리 마을이다. 만석꾼이었다는 최참판댁의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아마도 이 일대가 모두 최씨 가문의 땅이었을 것이다. 최참판의 땅을 지나지 않고서는 일상생활이 힘들었을 것이며 생계유지도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행복하지 않았던 최치수. 부(富)가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되뇌인다.
이곳은 원래 만석꾼이 날 수 없는 땅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드넓은 농경지가 되었지만 원래 큰 돌들이 많아서 농사를 짓기 힘든 땅이었단다. 하지만 지금은 섬진강이 흐르고 푸른 땅이 가득한 영락없는 만석꾼의 터전인 듯 하다.
나를 녹였던 붉은 꽃... 목련이 맞나?
▲ 행랑채
이야기가 있어 더욱 즐거웠던 최참판댁 여행.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소설 [토지]는 픽션이다. 물론 따지고 들자면 당시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이 없었다 할 수 없지만 사실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니 말 그대로 소설인게다. [토지]는 이곳에서 시작되었지만 너무 방대한 지역을 아우르고, 거대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기에 이곳이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짧음에도 잊혀지지 않는 강한 이미지를 남기고 있어 이곳이 [토지]의 전부인것처럼 느껴진다. 아직 [토지]의 전편을 모두 읽어보진 못했다. 뒤돌아 나오며 토지를 모두 읽는 날 다시 이곳을 찾으리라 다짐했다.
▲ 평사리문학관
최참판댁을 나오면 뒤쪽으로 평사리문학관과 한옥체험관을 만날 수 있다. 한옥체험관에서는 고택체험처럼 숙박이 가능하다.
[토지]가 최참판댁의 외동딸 서희를 중심으로 풀어나가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한 여성의 삶이라기 보다는 당시의 시대상을 서희라는 인물에 투영하여 그려낸 시대극이라 할 수 있다. 외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를 모티브로 [토지]를 시작하고, 25년 후 완성한 작품은 소설가 박경리선생에게도, 한국문학에도 거대한 획을 그은 대작이다. 올해가 토지가 완성된지 20년이 되는 해이다. 아마도 이런 대작이 나오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흘러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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