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로왕릉>
인근에 부산이라는 대도시가 있고, 멀지 않은 곳에 경주라는 역사도시가 있어 살짝 가려진 느낌이 없잖아 있지만 '김해'가 가진 문화적·역사적 가치를 스쳐지나가기엔 너무 큰 아쉬움이 있어 김해를 찬찬히 살펴보려 한다.
국립김해박물관에서 나와 김수로왕릉을 찾아가려 했지만 그 부인인 수로왕비릉이 좀 더 가까워서 왕비릉을 거쳐 왕릉으로 가기로 했다.
▶ 국립김해박물관 방문기: http://www.kimminsoo.org/755
앗! 그 전에 챙겨야 할 필수 아이템인 가야역사여행 어플!
잠못드는 밤 스마트폰 검색으로 시간을 보내다 우연히 만나게 된 <경주역사여행>어플을 사용해보고 반해버린 후 국내여행에서는 항상 관련된 어플을 검색해보는 버릇이 생겼다. 물론 이번에도 여행 전 다운받은 <가야역사여행>어플과 <국립김해박물관>어플이 함께했다.
<가야역사여행>어플은 완전하게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 가야의 시작이 된 구지봉에 대한 설명은 충분히 탑재되어 있어 하루여행에 있어 충분한 정보와 볼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일단 찾아가는 지도에서부터 시작해서 지역의 유래, 의미, 역사적 설명까지 꼼꼼하게 탑재되어 있어 아이들과 함께할 때도 필수적으로 사용할 만하다.
수로왕비릉은 국립김해박물관 뒤편 산책로를 통해 구지봉을 지나 갈 수 있는 방법(도보)이 있고, 길가로 난 정문을 통해 갈 수 있는 방법도 있다. 정문쪽으로는 주차장도 있어 차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정문을 이용하는 것을 좋을 것 같다.
수로왕비릉은 너무 잘 정돈되어 있어 마음을 정비하고 찾아가야하는 종교적 의식처를 찾은 듯한 느낌으로 마주했다. 사람들이 별로 없어 더 그런 느낌이다.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왜 수로왕릉과 왕비릉은 함께 있지 않는 것일까?'라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부부는 같은 공간에 묻히는데 무슨 이유로 수로왕릉과 이리도 떨어져서 위치한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묘는 진묘가 아니라 추측이 강하게 반영된 묘라고 한다(진짜인지, 아닌지 정확하게 이야기하기 힘들단 말이다). 그러니 어쩌면 이 근처 어딘가에 같이 묻혀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파사석탑>
돌들이 가지런히 줄지어 서 있는 이것은 수로왕비릉 앞에 서 있는 파사석탑이다. 허왕후가 가야로 올 때 배에 싣고 왔다는 바위들이다. 물론가야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이 또한 추정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비바람이 불어 인도에서 가야로 올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 걱정하고 있을 때 허왕후의 아버지가 이 바위들을 싣고 가면 괜찮을 것이라고 했는데 바위 때문인지 아닌지 허왕후는 인도에서 가야로 무사히 올 수 있었다.
허왕후의 무덤.
허왕후는 원래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였지만 하늘의 계시를 받고 수로왕비가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다문화교육에 관련한 책들을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다문화가족으로 수로왕과 수로왕비가 언급되기도 한다. 그리본다면 뭐... 나도 다문화가족인 셈이다. 약간의 억지스러움이 있지만 이런 설이 남아 있고,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들도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아~ 다른 곳에선 중국에서 왔다고 하기도 한단다.
경주의 왕릉이나 왕비릉과 비교한다면 한없이 작은 규모이지만 위엄이 서려있는 왕후릉이다.
수로왕비릉은 국립김해박물관 산책길과 연결되어 있어 도보로 방문할 수도 있고, 차를 이용한다면 큰 길로 연결된 곳으로 찾아올 수도 있다. 도보로 가보겠다고 산으로 올라 걷다가 다시 돌아올 길이(차를 찾으러 와야해서) 걱정되어 중간에 포기하고 차를 가지고 이동했다. 산책로를 이용하면 김해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도 거치니 한번 걸어보는 것도 좋다.
바로 여기!
김해공항과 연결된 경전철도 보이고, 김해 시내도 내려다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야의 설화가 담긴 구지봉을 거치게 되기 때문에 가야를 쏙쏙들이 이해하고자 한다면 꼭 한번 가볼만하다.
구지봉은 김수로왕이 황금알과 함께 내려온 장소라고 전해지는 곳이다. 붉은 보자기에 싸여 내려온 알 중에서 가장 먼저 깨어났다는 수로왕은 10일 정도가 지나 어른이 되었고 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금관가야를 세우게 되었다. 옛날 초등학교 때 이곳에 왔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데 그땐 어수선하게 나무와 풀들이 자라고 있어 그것들을 헤치며 갔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돌로 만든 알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 자리에서 없어졌다. 김수로왕릉에 가서 다시 만났는데 여러가지 이유로 이곳에서 이동했다고 한다.
가장자리에 있는 고인돌에는 한석봉이 쓴 "구지봉석"이라는 글씨가 남아있다.
놀라운 사실은 가야시대엔 이곳 김해가 바다였다고 한다. 이곳까지 배가 오갔던 흔적이 남아있고, 무엇보다 패총이 남아있어 이런 설에 더욱 힘을 실어주고 있다.
찬찬히 수로왕비릉을 둘러본 후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수로왕릉을 찾아간다. 사실 오늘 방문의 주목적은 수로왕릉이었으니까 그만큼 발걸음이 빨라진다.
수로왕비릉보단 좀 더 커 보이는 규모의 김수로왕릉이다.
김해의 유적지들은 입장료 없이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다.
수로왕비릉에는 릉과 석탑이 모두였다면 수로왕릉에는 다양한 전각들과 뜰이 함께있어 어찌보면 왕릉이 아닌 궁과 같은 느낌도 가질 수 있었다.
입구를 지나면 붉은색의 홍살문을 만나게 된다. 모양은 다르지만 일본의 도리이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보통 능묘나 궁전, 관아 앞에 주로 세우게 되는데 아마도 신성한 곳으로 들어가니 마음을 정갈히 하여라는 의미에선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납릉정문 넘어 보이는 수로왕릉은 수로왕비릉과는 다른 분위기다. 왕비릉에는 없었던 석상들이 왕을 보좌하듯이 서 있다.
납릉정문의 천정에는 수로왕비가 인도에서 가져왔다고 전해지는 "쌍어문" 그림이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 보진 못했다.
구지봉에 황금알로 내려와 가장 먼저 알에서 깨어났다는 김수로왕의 무덤. <삼국유사>에 실려있다는 수로왕의 신화의 핵심이다.
'왕이 나타날 것이니 모두들 왕을 기다리며 춤춰라'라는 하늘의 뜻을 받아 노래했다는 당시의 일화가 담겨있다.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만약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중학교? 고등학교? 여튼... 국어시간에 배웠던 구지가가 바로 그 때의 그 노래이다.
이것 말고도 김수로왕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고 하는데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여 명령이 그리 야단스럽지 않아도 위엄이 있고, 정치가 그리 엄하지 않아도 저절로 다스려졌다'라는 내용이라고 한다. 158해를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수로왕은 그리 많은 기록이 남아있진 않지만 그의 업적과 영향력은 대단히 컸다고 추정하고 있는 듯 하다.
수로왕에 대한 내용들... 모두 가야역사여행 어플에서 얻은 소중한 정보이다. 요렇게~ ^^
음성으로도 들을 수 있고, 문자로도 확인할 수 있다.
<숭안전과 전사청>
숭안전에는 가락국 2대에서 9대까지 왕과 왕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수로왕과 수로왕비는 숭선전이라는 옆 건물에 모셔져 있다. 묘는 함께할 수 없었지만 신위는 함께 모셔졌으니 그 만으로도 위로가 될까. 전사청에는 춘추제례에 필요한 제기를 보관하고 있다. 매년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에 춘추대제를 지낸다고 한다. 이 외에도 몇 개의 전각이 더 있다.
릉과 전각을 돌아나오면 연못을 만나게 되는데 날씨탓인지 연꽃이 만발하진 않았지만 조심스레 피어있는 꽃이 슬쩍 웃음짓게 한다.
과거 구지봉에 있었던 그 알이 연못 한 구석에 옮겨져 있다. 구지봉에는 조형물로 만들어진 알이 구지봉과 어울리지 않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문제가 있어 이곳으로 옮겨두었다는 문구가 있었던 것 같다.
넓은 앞마당이 시원스러워 보기가 좋다. 뒤로 있는 산도 멋지고. 아파트는 좀...
이렇게 김수로왕릉도 둘러보고... 재미가 붙은 스마트폰 어플 검색으로 찾은 김해봉황동 유적으로 향했다. 한번 찾기 어려운 길이니 온 김에 되도록이면 다 보자는 충동때문에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다.
봉황동 유적지에는 크게 2개의 볼거리가 있다. 금관가야의 생활유적지로 남은 봉황대와 회현리 패총이 그것이다.
산책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옛생활을 보여주는 주거지가 나온다. 물론 재현한 주거지이지만 당시의 생활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고상가옥은 당시의 특별한 주거상황을 보여주는데 이런 고상가옥은 주거지로 사용되기 보다는 주거지 옆에 위치하면서 오늘날의 창고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한다. 주로 일상생활은 위에 보이는 형태의 주거지에서 이뤄진 듯 하다.
이곳은 2002년부터 복원을 시작하여 2005년 정비를 마치면서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회현리 패총은 쉽게 말하면 조개무덤이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현재의 김해 일부가 바다였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이 바로 이 패총의 존재이다. 규모는 작지만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진 곳이기도 해서 학문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진 곳이다. 아쉬운 건 일본인들에 의해 발굴이 이루어졌다는 점이지만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나 싶다.
꼭 만들어 둔 것 같은 모습인데 빈 곳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조개껍데기와 각종 어패류의 잔재들이 남아있다. 이곳에서 토기와 동전, 불에 탄 쌀, 기타 다른 물품들도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7m의 높이로 동서의 길이가 130m정도가 된다고 하니 그리 작은 규모라고도 할 수 없다.
현재 가야역사여행 어플로 알아볼 수 있는 김해여행지는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 구지봉, 대성동 고분박물관이지만 우륵박물관과 대가야 역사관 등 6개의 정보도 업데이트 예정이니 김해를 방문할 때 가지고 간다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좀 더 알차고 의미있는 여행을 원한다면 말이다. ^^
'우리 마을 이야기(Korea) > 경상도(Gyeongsangdo)' 카테고리의 다른 글
14일 간의 On Air, 진주 남강 유등축제로 세상을 밝히다! (12) | 2012.10.03 |
---|---|
가을을 알려주는 코스모스길, 장천 코스모스 페스티벌(구미) (4) | 2012.09.30 |
[추천앱] 스마트폰 어플과 함께하는 국립김해박물관 탐방(한국관광공사) (6) | 2012.07.08 |
가려진 배흘림 기둥에 아쉬움만 남은 부석사 일주 (2) | 2012.05.28 |
경주에 버금가는 조문국 유적지, 의성 경덕왕릉 (6) | 2012.04.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