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눈이 떠졌지만 몸은 아직 이불 속이다. 창밖으로 어슴푸레 보이는 하늘은 내가 원했던 하늘이 아니었다. D-day를 정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인터넷 날씨를 찾아보며 첫 소풍을 앞둔 어린아이처럼 설레임과 걱정을 반복했다. ... 역시나 기대와 현실은 평행선을 고수했고, 결정장애를 가진 나는 짧지 않은 고민에 빠져야 했다.
‘그래, 칼을 뽑았으니 어떻게든 해보자’ 하는 심정으로 주섬주섬 짐을 싸고 길을 떠났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았지만 내 마음은 햇살로 가득했다. 이거면 된거다. 그래, 나는 진짜 “블루”를 찾아 떠난다.
길에도 색이 있나요?
몇 년전부터 들끓고 있는 걷기 여행에서 떠오르는 강자가 있다. 바로 2015 소비자선정 최고의 브랜드 대상에서 테마관광분야에 선정된 영덕 블루로드. 걷기 여행의 정점에 있던 제주올레가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해진 탓도 있겠지만 다양한 먹거리와 볼거리로 오감을 자극하는 동해바다의 유혹을 뿌리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문득 궁금해졌다. 왜 블루로드일까? 사실 블루가 담고 있는 색의 영역은 너무 광범위하다. 로얄블루, 네이비블루, 마린블루, 베이비블루, 아쿠아마린, 오리엔탈블루, 인디고... 헤아릴 수도 없는 많은 블루 사이에서 이 길은 어떤 파랑을 담고 있을까? 또 그 파랑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 답을 찾기 위해선 두 말 없이 길을 떠나야 한다.
사도사색
영덕 블루로드는 부산에서 강원도 고성으로 이어지는 해파랑길의 일부다. 하지만 이 길을 걸어본 사람들은 해파랑길의 한 코스로 분류되길 거부한다. 블루로드를 거닐며 즐기는 모든 것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자태를 뽐낼 수 있기 때문이다.
동해바다를 따라 이어진 64.6km의 길은 총 4개의 코스로 나눠진다. 빛과 바람의 길이라는 A코스, 푸른 대게의 길 B코스, 목은 사색의 길 C코스, 쪽빛 파도의 길 D코스... 그러나 이름만 들어서는 이 길이 가진 매력을 가늠할 수 없다.
A코스는 강구터미널에서 풍력발전단지를 지나 해맞이 공원에 이르는 17.5km의 구간이다. 친절하게도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블루로드의 시작이다. 여기서부터 노란 화살표를 따라 강구다리를 건너면 강구항으로 이어지는 맛길의 초입이다. 자칫 한눈을 팔다간 맛길투어로 이름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15km의 B코스는 가장 아름다운 블루로드를 자처한다. 시원한 해맞이 공원에서 내려다보는 동해는 그 어떤 곳도 흉내낼 수 없는 풍광을 품었다. 자랑할만한 것이 어디 이 뿐이랴. 바다를 가장 가까이 두고 걷고 싶다면 두말할 것 없이 B코스를 선택해야 한다.
C코스는 축산항에서 시작해 고래불해수욕장까지 산과 바다를 모두 아우른다. 특히 C코스는 역사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마주할 수 있어 그 의미도 남다르다. 조선시대 연락책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봉수대, 고려시대부터 명맥을 이어온 괴시 전통마을, 5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영해전통시장, 그리고 독립의 염원을 담은 태극기의 물결이 파도와 함께 울었던 3.18 만세운동 기념탑까지... 이 모든 것이 자연스레 녹아내려 만들어낸 것이 목은 사색의 길이다. 블루로드는 고래불해수욕장에서 끝난다. 그러나 그 끝은 진짜 끝이 아니었다.
D코스라 불리는 쪽빛 파도의 길은 왔던 길을 되돌아 대게 누리공원에서 강구터미널까지의 구간이다. 푸른 언덕을 배경으로 새하얀 대게 한 마리가 집게발을 드러내며 인사한다. 그 힘을 받아 모래사장이 장관인 장사해수욕장, 국내 최초 화석박물관인 경보화석박물관을 지나 삼사해상산책로와 삼사해상공원을 거쳐 강구항에 이른다. 알파벳이 A-B-C-D로 이어진다고 해서 꼭 그 순서를 따를 필요는 없지 않나. 동해를 따라 이어진 길을 한 번에 걷고 싶다면 D-A-B-C로 걸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하늘과 바다, 그리고 바람이 스며든 길
걷기 여행에는 ‘느림’, ‘여유’, ‘사색’ 등의 수식어가 붙는다. 이러한 이유로 긴 시간을 낼 수 없는 여행자들에게 걷기 여행이란 언제나 동경의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블루로드는 4개의 코스 중 하나를 선택하거나 각 코스별 베스트 구간만 걷는 것도 가능하기에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찾을 수 있는 길이다.
욕심 같아선 블루로드 4코스를 단번에 섭렵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기에 블루로드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코스를 선택했다.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극찬하는 B코스는 블루로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통한다. 출발점인 해맞이 공원에서 사방으로 펼쳐진 멋진 풍경에 감탄사를 쏟아내고 창포말 등대와 기념촬영을 하는 것으로 출발 의식을 대신했다. 의식이 효력이 있었는지 아침부터 흐렸던 하늘은 푸른색을 띠며 나를 환영해준다.
등대 아래로 바닷길을 따라 1km정도 걸으면 대탄항이 나온다. 시작이기에 마음도, 발길도 한결 가볍다. 바다를 옆으로 두고 걷는 길은 과연 B코스가 블루로드 대표길이라 불릴만 하다며 설레발까지 치게 한다. 몇 몇 구간 찻길과 오버랩 되지만 그리 불편할 정도는 아니다. 봇짐을 싣고 지나가는 자전거 여행자를 만나는 것도 색다른 재미가 된다.
B코스는 바닷길로 유명하지만 노물리 마을, 석리 마을, 차유 마을과 같은 작은 어촌마을의 풍경이 예고 없이 발길을 잡기도 한다. 대게가 유명한 영덕이지만 7-8월은 금어기이기 때문에 대게잡이 배와 그물은 고요히 여름잠에 빠진다. 대신 어촌마을들은 다양한 체험거리들을 쏟아낸다. 특히 대게원조마을(차유어촌체험마을)은 태조 왕건에게 대게를 진상했다는 것으로 원조에 대한 논란을 불식시키고, 의기양양하게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바다를 따라 걷는 길은 지루할 틈이 없다. 해녀상, 군인상과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제 역할을 잃은 초소도 만난다. 따개비와 고동, 미역 따는 일을 평생 업으로 했던 해녀들에게 바다는 어떤 존재였을까. 사실 바닷길을 걸으며 만난 바다는 보기에 좋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하늘은 파랗게 속을 보이며 웃고 있었지만 바다는 하늘과 달랐다. 햇빛 아래서도 쉬이 속살을 보이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만만히 본다 싶으면 상상할 수 없는 큰 파도로 나를 덮치기도 했다. 하늘만 보며 속 끓였던 아침의 내가 그리도 어리석게 여겨질 수 없었다. 해녀들에게도 그러지 않았을까. 먹을 것, 입을 것,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을 내어주면서도 단번에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는 존재, 한없이 어르고 달래야 겨우 한 뼘이나마 다가갈 수 있는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오직 한 곳, 죽도산에 초점을 맞추고 걸었던 내 여정은 블루로드 다리 앞에서 마지막 숨을 고른다. 땅과 바다를 거쳐 하늘에 당도하면 블루로드 B코스의 끝이 보인다. ‘대게’라는 이름을 하사한 죽도산은 과거엔 등대로 길을 밝혔고, 지금은 전망대로 환상적인 광경을 선사한다. 죽도산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축산항은 그 어떤 풍경보다 내 마음 속 깊이 새겨졌다. 갑자기 흐려지며 내려앉은 물안개와 두 뺨을 사정없이 때리는 바람도 그 감동을 막을 순 없었다. 이 길을 걸으며 느꼈던 수고스러움은 눈 녹듯 사라지고 아름다운 추억만이 15km의 길에 남았다.
못 가본 길은 아름다울 수 없다!
매년 사계절의 바다를 봐야겠다는 다짐을 한 후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바다는 포항과 영덕으로 이어진 동해바다였다. 그 때 동해바다는 다짐을 실행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지만 오늘 이후 만나는 이 바다는 더 이상 어쩔 수 없이 찾게 되는 그런 바다가 아니다. 이렇게 푸른 하늘과 바다, 푸른 바람을 담고 있는 블루로드는 여행자의 친구가 되었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고? 아니다. 이 길을 걷기 전엔 결코 알 수 없었던 아름다움이 있기에 감히 반기를 들어본다. 못 가본 길은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 블루로드 여행 팁
블루로드를 여행하는 방법은 정해져 있지 않다. 장장 65km에 이르는 블루로드를 한 번에 걷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혹 걷기가 불편하거나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자동차에 의지해 블루로드를 경험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7번 국도를 따라 달리다 강구항과 접한 소로를 따라 이동하면 바다를 좀더 가까이 느끼며 블루로드의 볼거리들을 대부분 경험할 수 있다. 장사해수욕장, 삼사해상공원, 풍력발전단지, 해맞이 공원, 축산항, 괴시리 전통마을, 고래불해수욕장... 그 어디를 선택하든 후회할 일은 없다. 아! 영덕에서 먹거리를 제외한다는 건 영덕을 보지 않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대게를 비롯한 다양한 해산물들을 계절에 맞게 맛보는 것 역시 여행자가 누려야 할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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