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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에 실린 여행기

[낙동강 Magazine VOL.08] 대구, 골목으로 다시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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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의 새소식이 나왔습니다.

올 한해는 대구중구골목에서 한참 서성일 것 같네요. 1코스부터 5코스까지 4~5회에 걸쳐 골목투어 기획기사가 나가게 되었습니다. ^^

한번 제대로 훑어보고 싶단 생각은 늘 가지고 있었는데 가까이에 있으니 언제든 가면 된다생각해 지금까지 미뤘던 것 같네요. 이제 천천히 제대로 한번 살펴보려 합니다. 저와 함께 대구 골목을 거닐어 보시지요.

 

 

 

 

 

약재의 도시, 능금의 도시, 미인의 도시, 섬유의 도시... 숱한 이름을 거쳐 ‘골목의 도시’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중심에서 멀어지지 않았지만 한번도 1인자이지 못했던 도시 대구가 골목을 모티브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며 걷기(길) 열풍의 별이 되었다. 제주올레에 천연의 향기가 머무른다면 대구 골목길은 삶의 향기를 내뿜는다.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골목길을 이야기로 풀어내어 1코스에서 5코스까지 나름의 색채를 지니게 되었다. 깊은 색채 속으로 빠져들며 골목 시간여행을 떠난다.


혹자는 인간의 삶을 돌고 도는 물레방아에 비유했다. 어찌 인간사만 그러하겠는가. 굴곡진 인생사에 기꺼이 동행자를 자처한 삶의 터전, 골목길. 신작로가 생기고 인파의 무리가 바람처럼 흩어져 더 이상 찾아주지 않을 때에도 골목길은 우리의 삶과 함께 했다. 우리네 인생처럼 돌고 돌아 다시 조명받게 된 골목길. 그날의 향수를 찾아 버려두었던 그 골목길을 다시 걷는다.

 

 

 ▣ 400년을 이어온 대구의 심장부, 경상감영 → 대구근대역사관

 

 

 

 

과거에도, 지금에도 ‘중구’는 대구의 중심이다. 물밀 듯이 밀려들어오는 상인들의 행렬과 인력거의 오감이 휘황찬란한 네온사인과 연기를 내뿜는 자동차로 바뀌었지만 그 위상은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이다. 귀에 익숙한 ‘중앙로’ 대로변을 뒤로 하고 들어선 작은 골목에서 보이는 대구의 풍경은 반전 중에서도 대반전이다.

 

 

 

 

 

대구 골목투어 1코스의 시작인 경상감영은 도심의 허파를 자처한다. 겨울의 찬바람도, 콘크리트 숲의 매서움도 이곳까지는 파고들지 못한 모양이다.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 추억을 곱씹고 있고, 젊은 연인의 다정스러운 모습도 간간히 만날 수 있다. 1601년부터 1910년까지 300년이 넘는 세월을 주름잡으며 경상북도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을 담당했던 경상감영은 두 채의 건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위엄은 오롯이 남아있다. 공원입구에 세워져 있는 ‘하마비’는 종이품(從二品) 이하 벼슬들은 말에서 내려 걸어들어오라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경상감영의 존엄을 그대로 보여준다. 현재 남아있는 선화당(관찰사 집무실)과 징청각(관찰사 처소)은 재건되긴 했지만 200년이라는 짧지 않은 역사를 지녔다. 거창하게 꾸미지 않아 더욱 소담스러운 곳. 경상감영의 시끌벅적함은 사라졌지만 언제든 찾아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추억의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경상감영은 근대 르네상스식 건물인 대구근대역사관으로 이어진다. 비교적 그 원형을 잘 보존해온 건물은 1932년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으로 지어졌다. 일본이 조선의 식민지화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세운 국책은행으로 해방 후 한국산업은행 대구지점으로 사용되었다가 2011년 근대역사관으로 새롭게 탈바꿈하여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대구의 근현대사를 한 눈에 담을 수 있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역사공부의 장을 제공하고, 어르신들에게는 지난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장이 되고 있다. 특히 대구 최초의 부영버스를 타고 떠나는 근대 골목으로의 여행은 역사여행의 하이라이트가 된다.

 

 

 ▣ 예술인의 혼을 아로새긴 향촌동 거리

 

 

 

 

지금까지가 골목길 여행이라 하기에 조금은 멋쩍은 여정이었다면 이제는 진짜 골목의 진가를 만나러 갈 차례이다. 향촌동 골목은 세월의 뒤안길에서 그저 이름만 남아있는 곳이지만 한 때는 대구에서 자타공인 으뜸이었던 곳이다. 수제화 골목으로 들어서니 알싸한 가죽냄새와 리드미컬한 망치소리가 온 감각을 자극한다. 어디선가 먼지가 뽀얗게 쌓인 구두 한 켤레가 튀어나와 왜 이제야 왔냐고 투정을 늘어놓을 것만 같다.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져가고 있는 곳이지만 공장에서 찍어나온 기성품이 싫은 사람들, 어떤 모양의 발이라도 꼭 맞게 제작해주는 장인의 손길이 그리운 사람들은 지금도 향촌동 수제화 거리를 찾는다. 이 구두들이 화려한 영광을 다시 찾을 날은 언제일까.

 

 

 

 

 

한 때 향촌동은 한국예술의 집합지였다. 한국전쟁 전후로 다방과 술집, 음악감상실 등이 생겨나며 예술가들은 이곳으로 모여들었고, 지금에까지 ‘예술의 거리’라는 이름으로 불리운다. 당시 난리를 피해 남으로 향하던 사람들의 무리에는 박목월, 유치환, 구상과 같은 시인들과 화가 이중섭, 영화인 신상옥, 최은희 등 많은 예술가들도 함께했다. 일본의 치하에서 벗어나기가 무섭게 민족상잔의 아픔을 겪었던 젊은 날의 그들은 가난하고 처참했지만 그 속에서도 낭만을 꽃 피웠다. 그들의 몸짓이 한국 예술의 시발점이 되어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지금은 쓸쓸한 입간판만이 그 흔적을 알려준다.

 

 

 ▣ 대구 최대 상업골목에서 특성화 골목으로: 공구골목 & 오토바이 골목

 

 

 

 

향촌동과 대안동의 접점에서 천리교, 천주교, 개신교, 3개의 종교건물이 이어진 특이한 풍경을 만났다. 펼쳐진 풍경도 특이하지만 감옥터에서 사찰로, 사찰에서 난민수용소로, 난민수용소에서 성당과 천리교 교회로. 변화무쌍했던 그들의 이야기는 더욱 놀랄만하다.
이어 1Km 남짓한 골목은 이름도 유명했던 ‘북성로’다. 지금은 철제가 가득한 공구골목이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지금의 중앙로 못지않게 화려하고 부유한 곳이었다. 일본이 계획 하에 대구읍성을 허물고, 길을 터 북성로를 만들었고, 이곳에 한국 최초의 백화점과 서점, 포목점, 도자기점 등을 유치하며 상업 지구화 시켰다. 그리고는 이 길을 순종황제가 걷도록 만들어 조선인들에게는 뼈에 사무치는 아픔을 각인시켰다. 그 아픔이 내게도 전해오는 듯 하지만 그것에 머무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지금의 북성로는 없는 것이 없는 국내 최대의 산업공구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전쟁시 군수물품 판매에서 대구의 섬유산업, 자동차산업으로 이어지며 가파른 성장을 거듭해 왔다. 비록 대구유통단지가 개장하면서 어느 정도 분산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산업용품을 구입하기 위해 이곳으로 모여든다. 공구시장을 한 바퀴 돌면 자동차, 로봇, 어떤 것이든 뚝딱 만들어낸다하니 감탄의 연속이다. 각종 공구들의 쓰임새를 제대로 보고 싶다면 공구박물관을 지나쳐선 안된다. 아담한 일식 건물에 빽빽하게 들어찬 공구들의 모습에서 북성로를 대표할 곳으로 공구박물관 만한 곳이 없음을 자부하게 한다.

 

 

 

 

 

이즈음이면 잠시 쉬어가도 될 듯하다. 북성로의 또 하나의 명물인 삼덕상회는 1930년대 지어진 일본식 가옥을 그대로 살려 카페로 운영하고 있다. 커피, 허브차, 쥬스는 기본이며 여름에는 시원한 빙수를, 겨울에는 뜨끈한 단팥죽을 판매하고 있다. 때때로 운이 좋으면 아마추어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기도 해 특별한 경험을 만들 수 있다. 무지의 노트에 끌쩍여 놓은 무명의 흔적들은 언젠가 한번은 옷깃을 스친 인연이었을 것만 같다.

 

 

 

 

다시 걸음을 옮겨 오토바이 골목으로 향했다. 나이에 상관없이 남성들의 영원한 로망인 오토바이를 원 없이 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선 가죽점퍼를 입고, 머리를 휘날리며 오토바이를 타는 멋진 오빠들을 만날 수 있으려나 했는데 생각이 너무 앞서갔나 보다. 스산함마저 깃든 이곳에서 번쩍이는 광택을 자랑하는 오토바이가 하염없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오토바이 거리의 끝에는 삼성그룹의 모태인 삼성상회의 옛 터가 있다. 세계 굴지의 기업 삼성그룹의 최초 자본금이 3만원이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그 보다 더 놀라운 것은 글로벌 기업으로 전자시장을 쥐락펴락하는 삼성그룹의 터전이 너무도 터무니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때 박물관이었다는 이름을 무색하게 만든다. 삼성과 대구의 긴 인연에 담겨있는 말 못할 사연을 짐작케 한다.

 

 

 ▣ 골목투어 1코스의 끝, 달성

 

 

 

 

대구의 옛 이름이 ‘달구벌’이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달구벌이 ‘달성’에서 유래된 이름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달불성(達弗城)을 줄여 달성이라 불렀는데 당시에는 흙으로 만든 토성이었다고 한다. 으레 성곽은 높은 곳에 쌓는 법, 그래서인지 달성에 올라서면 지금껏 둘러본 대구 중구의 모습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다. 안타깝게도 이처럼 대구를 내려다보기 위해 달성에 오르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높은 빌딩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묘한 풍경을 어찌 대구 사람들은 잊고 사는 것일까 마음 한 켠이 아려 온다.

 

 

 

 

 

대구 유일의 동물원인 달성공원은 언젠가부터 시간이 멈춘 듯하다. 세상의 변화에 어찌 이리 둔할 수 있었을까. 단지 변한 것이라곤 입구를 지키던 키다리 아저씨가 없다는 것, 넓게만 보이던 공원 광장이 성장한 나에게 좁디좁은 공원에 불가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실망할 것은 없다. 그때 보지 못했었던 다른 것들을 담으면 되지 않나. 그저 동물원으로만 생각했던 달성공원에는 대구를 되새김질할 수 있는 비석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이상화 시비, 최제우상, 허위 선생 순국 기념비, 대한민국 어린이헌장비... 지금은 운동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벗이 되어주고 있지만 머지 않은 날 제자리로 찾아가리라 믿어본다. 그들의 새로운 탄생이 어떤 모습일지 사뭇 궁금해진다.

 

유럽의 아기자기한 골목길을 걸으며 ‘왜 우리에겐 이런 골목길이 없을까?’하고 생각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한번도 찾으려 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대구의 골목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앞만 보고 달리지 말고, 화려하게 치장한 것들에 혹하지 말아라. 너의 주변에 있는 가까운 것들에 먼저 관심을 가져보아라.” 이제 내가 대답할 차례다. “변함없이 함께 해주어 정말 고맙다고...”

 

 

 

<대구골목투어 1코스 지도: http://gu.jung.daegu.kr/alley/main/main.html(중구청 골목투어 홈페이지)>

 

※ 지면의 사정상 담지 못한 내용들은 개별 포스팅으로 안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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