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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에 실린 여행기

[낙동강 Magazine VOL.07] 김해 봉황동 유적에서 만나는 옛 사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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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지나긴 했지만...

올해부터 글을 싣기 시작한 [낙동강 Magazine] 2013년 마지막 글입니다.

시간에 쫓겨가며 어려운 점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놓고 싶지 않은 끈 중의 하나였습니다.

총 4번의 글을 실으며 참 좋은 경험을 한 듯 합니다. 뒷걸음질 칠 때도 있지만 이렇게 한 걸음씩 나가 보렵니다.

 

 

 

※ 사진은 해당 잡지와 다를 수 있습니다(잡지보다 많은 사진을 올렸습니다).

 

 

어버린 조각찾기, 가야

 

 

 

 

유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가야”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작은 부족국가로 잠깐 스쳐가는 바람처럼 우리 역사에 이름을 올렸지만 그들이 남긴 흔적은 생각보다 짙었다. 잃어버린 조각 하나를 찾아 마침내 완성하는 퍼즐놀이처럼 그 옛날 가야국의 이야기를 꺼내보려 한다.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마지막 조각을 찾는 짧지만 의미있는 여정을 이렇게 시작했다.

 

 

 

 

자연은 사람보다 한 걸음 빠르게 계절의 흐름을 받아들인다. 미처 달아나지 못한 여름의 잔흔과 씨름을 하고 있는 우리와 다르게 산천의 초목들은 가을 옷으로 갈아입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덕분에 봉황동으로 향하는 길은 지루할 틈이 없었다.
“김해에 왔으니 응당 가야국의 시조를 먼저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누군가는 말한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오늘은 ‘그들만의 이야기’보다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죽어서 조차 감히 근접할 수 없는 쇼윈도에 갇힌 왕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터전에서 비슷한 모습으로 살다가 흔적도 없이 사그러진 백성들의 삶이 여행자의 호기심을 더 자극한다.

 

 

 

 

가야는 시작부터 강고했다. 하늘의 뜻을 받아 땅으로 내려온 알에서 9척의 아이가 나왔는데 그가 바로 금관가야의 초대 왕 김수로이다. 백성들이 저절로 따를 만큼 위엄으로 국가를 다스렸고, 주어진 자원을 잘 활용하여 “철의 제국”이라는 강철같은 이름을 역사에 각인시켰다. 정말 하늘의 뜻이라도 받았는지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이웃삼고, 드넓은 평야를 가슴에 품은 입지적 조건이 생활과 문화를 한층 높은 격조로 올려주었다. 일찍부터 쌀농사를 지어 밥을 지어먹었고, 지리적 조건에 적합한 주거형태도 만들어냈다. 심지어 외국과의 교역 흔적도 남아있어 그들의 움직임이 나라 밖으로도 활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자부심 때문이었을까. 532년 신라에 흡수되면서 역사 속에서 “가야”라는 이름은 사라졌지만 가야인들의 활약은 신라를 굳건히 지켜내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해 봉황동 유적지

 

 

 

 

농경을 삶의 토대로 삼은 우리의 선조들은 어디에서든 옹기종기 모여 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 이러한 특성을 반영하여 문화재보호법에서는 유적지와 인접한 곳에 주택이나 도로를 지을 때는 사전조사를 통해 유물유구의 여부를 살펴보도록 명시하고 있다. 가야의 유적지가 다수 분포되어 있는 봉황동 일대에 일반주택 신축을 위한 시굴조사가 실시되면서 이 일대가 금관가야의 중요한 생활근거지임이 밝혀졌고, 작년 6월 가야시대 선박의 일부를 발굴하면서 유적지 개발 사업은 더욱 탄력을 받았다. 2002년부터 복원을 시작하여 지금은 꽤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고 있어 김해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인기 산책코스가 되었다. 걷기 열풍에 힘입어 최근 만들어진 “가야사 누리길”은 ‘역사탐색’과 ‘심신의 힐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을 수 있어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까지 생겼다고 한다.

 

 

 

 

평지에서 시작된 유적공원은 나지막한 언덕으로 이어지는데 마치 보물찾기를 하듯 곳곳에 숨겨진 가야인들의 삶을 찾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과거 봉황동 일대는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라는 속담처럼 오랜 시간이 바다를 육지로 바꾸어 놓았다. 많은 배들이 오가고 교역이 이루어졌을 창고터와 기둥이 이곳에서 발굴되면서 ‘추정’이 ‘사실’이 되었다. 덕분에 지금 봉황동 유적지를 찾는 우리는 그들이 이용했을 법한 굴립주와 고상가옥, 망루 등 생생한 생활터전을 만날 수 있다. 다른 역사에 비해 자료가 턱없이 부족하였을 터인데도 최대한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기 위해 연구한 흔적이 엿보인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아직 무르익지 못한 시간의 무게가 너무도 가볍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챈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 않는가. 나는 시간의 무게를 느낄 수 없을지언정 나의 후세대가 이곳을 찾게 되었을 때, 그만큼의 무게를 더해 이곳을 보게 되리라는 생각으로 애써 위로를 해본다.

 

 

야인들의 삶과 문화

 

 

▩ 고상가옥과 가야의 배 모형

 

 

 

 

 

 

봉황동 유적지 초입에는 철제 갑옷과 투구를 쓴 기마무사상이 세워져 있다. 뿜어 나오는 기개는 영락없는 철의 제국 늠름한 기사상이다. 그렇다고 투박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섬세한 말안장의 장식과 말투구는 예술적 가치로 환산해도 그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다. 가야인들의 문화적 우수성은 당시 주거공간에서도 살펴볼 수 있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에서는 가야의 주거생활에 대해 ‘땅을 파서 지은 초가 움집에 문이 나 있고 온 가족이 한집에서 산다(居處作草屋土室 形如塚 其戶在上 擧家共在中)’고 전한다.

 

 

 

 

 

 

 

 

 

수혈주거형태, 일명 움집이라고 하는 형태로 땅을 파서 뼈대(벽)를 세우고 초가를 얹고, 바닥에는 온돌을 넣어 계절을 나게 했다. 이렇게 만들어 놓고 나니 사람들이 살기에는 금상첨화이지만 힘겹게 일구어놓은 곡식들은 짐승들의 몫이 되기 일쑤였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고상가옥이었을 듯하다. 농사를 지어 수확한 생산물들은 자연재해나 짐승의 침범에도 지켜낼 수 있도록 지면보다 높은 위치에 고상가옥을 만들어 보관하였다. 가야인들은 집을 한 채 지어도 그 용도에 따라 적절하게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부족이었다. 작은 국가이면서도 500여년을 이어온 저력이 여기서 드러나는게 아닐까 싶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봉황동 인근지역이 과거에는 바다였다는 사실이다. 활발한 대외무역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도 강과 바다가 연결되어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기에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유적지에서 출토된 배모양 토기를 보고 배의 모양을 추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2012년 6월, 가야 ‘선박의 조각’과 ‘노’, ‘돌로 만든 닻’을 발굴해내면서 추정으로 복원한 유물들은 생명을 더하고, 가야는 ‘해상왕국’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어쩌면 머지않아 허황후가 인도에서 타고 온 배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조금은 맹랑한 생각도 해 본다. 어찌됐건 가려져 있던 가야의 이야기들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는 점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지금은 작은 규모로 당시의 모습과 배를 복원해 두었지만 곧 이곳엔 가야시대의 항구가 복원될 예정이라 한다.

 

 

▩ 망루

 

 

 

 

 

 

주거 복원지역을 조금 벗어나면 높이 솟은 나무들 사이에서 원두막처럼 사방이 뚫린 건물이 보인다. 원두막이 서리꾼들을 살피고 채소와 과일을 지켰다면 이곳에서 복원된 망루는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는 막중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지금에야 고도의 기능을 가진 망원경이나 방위시설을 통해 앉은 자리에서도 외부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오로지 두 눈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더 멀리, 더 빨리 해안가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높은 지대에 망루를 세웠을 것이다. 높은 지대에 자리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3층으로 쌓아 오르내릴 수 있는 사다리를 연결해 두었다. 조금은 어설퍼 보이기도 하지만 마을을 보호하겠다는 의지만은 작다할 수 없겠다.

 

 

 

 

▩ 황세바위와 여의각

 

 

 

 

 

 

이제부터는 조금은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야 한다. 그리 높은 언덕도 아닌데 벌써부터 숨이 차 오른다. 산책하기에 딱 좋을 정도로 만들어 둔 오솔길에서 억새의 무리가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노랫소리가 어쩌면 사랑을 속삭이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여의낭자와 황세장군의 러브스토리를 만날 수 있었다. 인생사의 필연적인 것이 사랑이라 하지 않았던가. 친한 친구사이였던 황정승과 출정승은 그 우애가 자식에 까지 이어지기를 바라며 둘 다 아들을 낳으면 의형제로, 각기 아들과 딸을 낳게 되면 결혼을 시키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황정승의 집안이 몰락하면서 출정승은 자신의 딸(여의)을 아들이라 속여 황정승의 아들(황세)과 의형제를 맺게 했다. 여의가 정말 남자인줄로만 알았던 황세는 오줌멀리누기 같은 또래 사내아이들의 놀이를 함께하자고 요구했다. 그 때마다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지만 여성의 면모를 갖추어 가는 외모까지는 감출 수가 없었다. 황세가 아무래도 수상하여 냇가에서 멱감기를 함께하자고 하자 여의는 어쩔 수 없이 여자임을 밝히고 결혼을 약속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황세를 어여삐 여긴 왕은 자신의 딸과 결혼시켰고, 이후 황세장군을 그리워하다가 여의낭자는 꽃다운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연이어 황세장군 역시 여의낭자를 그리워하다 병을 얻어 죽었다. 황세장군과 결혼한 유민공주는 출가하여 여승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어린 시절 황세장군과 여의낭자가 오줌멀리누기 시합을 한 곳이 바로 황세바위라고 한다. 황세바위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여의낭자의 정절을 추모하는 작은 사당이 있다. 지금은 굳게 닫혀있지만 매년 단오날이 되면 여의낭자 추모제가 열린단다. 그들의 아련한 사랑이야기 때문일까. 나도 모르게 숙연한 마음에 고개가 숙여진다.

 

 

 

 

 

▩ 회현리 패총

 

 

 

 

 

 

 

김해 유적 나들이는 회현리 패총에서 정점에 이른다. 국내 최초의 고고학 발굴조사로 이름을 남긴 회현리 패총은 문화적으로도, 학문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진 곳이다. 일본인에 의해 첫 발견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유감스럽긴 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도리가 아니었나 싶다. 봉황동 주변이 바다였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나는 이곳에서 불신의 마음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조개무덤을 패총이라 이르지만 조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쓰레기 등이 오랜 세월 퇴적되어 형성된 층을 의미하기도 한다. 층층으로 이루어진 퇴적층을 살피던 중 중국식 화폐와 일본 토기, 불에 탄 쌀, 조개 무더기, 김해 토기, 뿔도구, 동물의 뼈 등 무수한 유적들이 발견되어 그들 삶의 단면을 더욱 사실적으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 모습을 생생하게 느껴보라고 패총 유적지를 그대로 보존해두고 관찰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유리로 둘러싸인 작은 전시관에 들어서면 빈틈없이 빼곡하게 채워진 조개껍데기와 어패류 잔재들이 ‘보았으니 이젠 믿어라’고 내게 이야기하는 듯하다.

 

 

야로 다시 태어나는 김해

 

 

 

 

 

쉴새없이 오가는 비행기의 엔진소리, 하늘을 떠다니듯 부드럽게 미끄러져 가는 경전철, 빠르게 오가는 자동차의 움직임은 김해가 미래형 첨단도시임을 증명하지만 한 꺼풀 벗겨 그 속으로 들어가면 천오백년 전 우리 문화의 기틀을 형성한 고대 문화도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07년 회현리 패총을 시작으로 간헐적으로 이루어진 발굴복원사업은 지금에 와서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내일이 더욱 기대되는 곳이다. 경상남도에서는 가야유적지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유적지 지정, 학술대회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노력이 결실을 맺으면 가야는 한국의 역사를 넘어 세계인이 함께 보존하고 가꾸어갈 세계의 유산으로 이름을 올리게 되는 것이다. 모쪼록 그들의 노력이 풍성한 열매를 얻어 우리가 함께 기념하고 보존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 가야문화 탐방기: http://www.kimminsoo.org/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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