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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of All/Book Review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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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산도르 마라이 (솔,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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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세가 넘은 한 장군은 이 날을 위해 41년 43일 동안 기다렸다.
헨릭, 곤라드, 크리스티나, 그리고 니니.
아버지를 따라 군대에 들어간 헨릭은 절친 곤라드를 만나게되고, 이들의 우정은 24년간 이어진다. 우정이라기 보다는 형제애라고 할 수도 있겠다. 서로 처한 상황도 다르고, 성격도, 사회경제적 지위도 달랐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어느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우정을 가진 절친이었다. 헨릭이 결혼한 후 2인의 관계는 3인의 관계로 확대가 되면서 완벽해 보이는 관계를 유지해갔는데, 어느날 새벽 사냥터에서 헨릭은 곤라드와 크리스티나 사이에 자기가 알지못했던 묘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그 이후 이들의 관계는 각각의 1인 관계로 변화되었고, 서로 만남도, 어떤 교감도 없었다. 헨릭을 죽이려했던 계획을 실패한 곤라드는 현실을 떠나 멀리 아시아로 떠나버렸고, 한순간에 곤라드에게 버림받은 크리스트나는 헨릭과의 관계도 단절되어 버리고, 8년 후 사망한다. 헨릭 역시 세상과 동떨어져 살아가며 그들의 관계에 대해 의문을 품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나간다.

그리고 41년 후 곤라드와 헨릭이 만났다. 그것도 친구에게 총구를 겨누던 곤라드가 먼저 찾아와서... 헨릭은 그 동안 가졌던 의문을 풀기위해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이야기의 대부분은 그의 질문과 답변만으로 거의 진행된다. 자신이 친구에게 하고픈 질문은 이미 답이 나와있는 질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헨릭은 오랫동안 한쪽을 억누르던 짐을 벗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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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도르 마라이. 그의 작품에 손을 대었다가 한번 실패한 경험이 있어 괜한 두려움(어려우면 어쩌나...)을 가지고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41년 43일의 기다림을 단 하룻밤에 풀어내버린다. 다른 소설에서는 한장이면 끝날 이야기를 장장 270여 페이지를 통해 풀어낸다. 그러면서도 장황함이나 지루함은 전혀보이지 않고, 간결하면서도 굉장한 압축력을 보여주는 것 같다. 중간 중간에선 숨이 막힐 정도의 압축력을 보인다. 그 압축력이 나의 가슴을 졸이게 만든다.

40여년이 지난 후에도 그날의 상황을 아주 세세하게, 사소한 물건하나의 위치까지 기억하고 있는 헨릭에게 곤라드는 '그런 세세한 일까지 기억하냐'고 질문한다. 그때 헨릭은 "이따금 세세한 일이 아주 중요할 때도 있어. 말하자면 그런 것들이 전체를 지탱해주고 기억의 파편들을 응집시켜주지."라고 답변한다. 그에게는 아픈 기억이지만 그것을 잊는 것보다 아주 세세한 것까지 기억하는 것이 이후 40년의 삶을 지탱하는 것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그것이 내 머리 속에, 가슴 속에 남아있음으로 삶의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가 이렇게 살아있을 수 있었음은 그 기억에서라기 보다는 '니니'라는 사람이 그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키고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것에 더 무게를 싣고 싶다. 이 소설에서 크게 부각되지는 않지만 90세가 훌쩍 넘어 힘빠진, 늙은 그녀는 말할 수 없는 깊은 포스를 품기고 있다.

사랑이야기인지, 우정이야기인지, 아니면 인생의 동반자 이야기인지 명확하게 구분지을 수 없지만 굳이 구분지을 필요도 없을 듯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가슴 깊이 기억의 울림을 불러일으키는 내용.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리다.

곤라드에게 던진 두번째 질문. "우리가 과연 우리의 영리함, 오만, 자만심으로 무엇을 얻었는가?" 나는 도대체 이 책에서 무엇을 얻었는가? 그리고 나의 삶에서는? 또 이렇게 써내려 가는 이 순간, 이것은 내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나도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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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생명 공동체든 도움을 주는 강한 존재가 있기 마련이지. 나는 동물들 세계에서 수없이 많은 사례들을 보았네.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서는 별로 못 보았어. 아니, 단 한번도 보지 못했다는 말이 더 맞네. 내가 본 사람들 사이의 호감은 결국 모두 허영과 이기심의 늪에 빠져 질식하고 말았지. 동료애와 동지애가 어쩌다 우정처럼 보일 때가 있어. 공동의 관심이 우정처럼 보이는 상황을 만들어내기도 하지. 또 사람들은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친밀함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하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한동안 일종의 우정으로 보였던 친밀함을 후회하게 되지. 이런 것들은 물론 진실한 것이 아닐세.

 

현재의 자기와는 달라지고 싶은 동경, 그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인간의 심장을 불타우는 동경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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