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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이야기(Korea)/전라도(Jeollado)

충무공이 걸었던 여수의 구석구석(진남관, 선소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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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 신.

위인이라 일컬어지는 수 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저 한 사람이었던 충무공이 내 가슴 깊게 박힌건 첫 대목부터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던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를 통해서였다. 언어로 표현된 인간적인 고뇌였지만 충무공을 보여주는데에는 그 이상의 표현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때부터 충무공은 머리 속에서 박제되어있는 위인이 아닌 가슴에서 살아있는 한 사람으로 내게 다가왔다. 우연한 여행, 여수에서... 다시 충무공은 내게로 걸어왔다.

 

 

 

 

 

한여름의 푸른 빛은 더 없이 아름다웠을 법한데 가을 끝자락에 선 지금은 긴~ 겨울잠에 빠질 준비를 하는 모습이 안쓰럽게만 느껴진다. 겨울의 메마름도 시간의 한 꼭지건만 나는 왜 이 시간이 힘들게만 느껴지는지 원... 시작도 않았는데 큰일이다.

 

 

 

 

진남관 임란유물관은 거북선의 내부 모형과 당시 사용했었던 갑옷과 무기, 왜란당시 작전상황 등이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다.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에는 큰 도움이 된다.

 

 

 

 

 

 

전라좌수영의 축소모형에서는 그 옛날 여수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우뚝 서 있는 진남정이 당시의 위엄을 그대로 드러낸다. 산아래 작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도 조선시대 우리동네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전라좌수영 앞 수로에 만든 철쇄방비시설이다. 빈번하게 일어났던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지금의 장군도와 돌산도 사이에 쇠사슬로 방비시설을 만들어 평소에는 감추어두었다가 왜구가 침입하면 들어올려 격퇴할 수 있는 시설이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것들을 통해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알 수 있단다.

 

또 한가지 알게 된 사실은 거북선이 2층으로 축조되어 공간을 활용했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많은 고민끝에 만들어진 것인지 그저 흘려들을 것이 아닌듯 하다.

 

 

 

 

 

 

작은 박물관을 거쳐 500여년 전 여수의 중심이었던 진남관으로 향한다. 임진왜란 작전 지휘의 핵심이었던 진해루의 터에 충무공을 기리는 마음으로 지은 곳이 진남관이다(이시언에 의해 건립된 이곳이 불에 탄 후 충무공 전사 120주년을 기념하여 전라좌수사 이제면이 재건했다). ―자형으로 길게 뻗은 건물은 현재 남아있는 지방관아 건물 중 가장 큰 규모라는데 어찌 벽면은 없고 기둥만 남아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여름엔 바람이 잘 통해 좋았겠지만 겨울엔 바닷바람이 만만찮았을텐데 말이다. 건물 앞의 돌기둥(석주화대)은 불을 밝히기 위한 용도로 세워둔 것인데 원래 4개였으나 현재는 2개만이 남아있다. 세월의 흔적인 고스란히 남아있다.

 

 

 

 

 

 

 

진. 남. 관.

"남쪽의 왜구를 진압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

 

 

객사로도 사용되고 일제시대에 와서는 여수공립보통학교로 사용되면서 건물이 많이 훼손되었다고 하니 어쩌면 이 모습이 세워진 당시의 모습이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국보로 지정된 귀한 문화재다. 일본이 뿌려놓은 곳곳의 흔적이 씁쓸한 것도 어쩔 수 없는 역사인 듯 하다.

 

하지만 이곳에 선 지금, 무엇보다 먼저 떠오르는 건 진남관 중앙에 서서 여수 앞바다를 바라보며 나라를 걱정했을 충무공의 모습이다.

 

 

 

 

 

충무공이 세웠다는 석인상은 왜적의 침입을 막고자 7구를 세웠지만 현재는 1구만 남아 진남관을 바라보고 있다. 여수 앞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이곳은 전략상으로 귀한 장소였음을 온 몸에 전율이 일만큼 전해져 온다.

 

 

 

 

 

역사로 전해오는 많은 인물들 중 어느 한 사람도 그들의 이름이 없다면 지금의 역사를 거론할 수 없겠지만 충무공은 그 역사 중 손에 꼽히는 몇이 아닐까 싶다. 홀로 울면서 세상을 웃게 만든 몇 안되는 사람 중 한 사람으로 무지(無知)하다 할 만큼 나라에 대한 충정을 보여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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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남정에서 5분 정도만 걸어나오면 이순신 광장이 있다. mini라 이름 붙이기에도 너무나 작고 귀여운 거북선부터 시작해서 격전이 일었던 해전지에 대한 설명까지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이렇듯 빈번한 전쟁에서살아남은 이곳이 남달리 느껴지는건 나 뿐일까.

 

 

 

 

 

충무공하면 누가 뭐라해도 제1의 연관단어는 거북선일 것이다.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형을 가진 거북선의 첫 시작이 이곳 선소부락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은 것 같지 않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2개월 전 충무공은 이곳에서 거북선 건조를 준비했고, 그 시작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거북선은 여수선소, 순천선소, 방답진선소 세곳에서 건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모두 3척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입구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붉은 빛의 아름다운 꽃... 예전 누군가의 블로그(해우기님이었나? ^^;)에서 본 기억이 나는데 꽃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사진으로만 보던 꽃을 만난 기쁨에~ ㅎㅎ

 

 

 

 

풀뭇간은 거북선과 여타 수군들의 무기를 제조하고 수리했던 곳이다. 이곳의 모든 것들이 복원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 "진짜"라는 진위를 가리라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우리 역사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기쁨에 한 걸음에 달려가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복원이 시작된지 얼마되지 않았고, 복원이 완전히 끝난 상태가 아니기에 이곳을 찾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지만 곧 사람들로 가득할 수 있을 것이다.

 

 

 

 

 

세검정(1986년 복원)은 거북선을 만들 때 주요 집무를 보고 지휘를 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고(古)지도에는 나오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만 발굴작업을 통해 건물의 흔적을 발견하여 복원했다 한다.

 

넓은 바다를 등지고 있는 선소 주변은 본진은 주변 위치를 명확히 파악하고 대비할 수 있지만 적진은 이곳의 존재 조차 알 수 없도록 만드는 최적의 요새였음이 틀림없다.

 

 

 

 

굴강이라 불리는 이곳이 바로 거북선의 시작이 되었다고 보는 곳이다. 방파제와 선착장의 역할을 했던 이곳은 거북선이 2채가 들어갈 수 있는 규모라고 한다. 규모로 봤을 때 거북선이 생각만큼 그리 크지 않았다는 느낌도 드는데 실제의 모습을 알 수 없으니 궁금증만 더 커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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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베니키아 호텔에서 가까운 곳에 있으니 산책삼아 가볼만한 곳이기도 하다.

 

▶ 여수 베니키아 호텔: http://www.kimminsoo.org/789

 

 

여수는 가히 충무공의 도시라 해도 될 만큼 관련된 유적이 많은 곳이다. 작은 마을이지만 여수세계엑스포를 통해 세계로의 도약을 시작하였고 그 준비를 해나가며 유적지나 기타 볼거리들에 세심하게 신경썼다는 느낌도 적잖이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축제가 그러하듯 축제가 끝나고 나서 퇴물이 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엑스포공원에서는 그런 느낌이 적잖이 들었다. '여수'라는 도시의 미래가 어떻게 달라질지는 지금부터의 행보가 중요하리라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게 잘 마무리하고 보존해나가면 좋겠단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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