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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마을 이야기(Europe)/스위스(Switzerland)

[루체른] 가벼운 저녁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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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에서 아침 7시에 탄 기차로 루체른에 도착하니 저녁 7시가 다되었다. 12시간의 긴 여행을 마치고 숙소에서 가볍게 한국에서 가져 간 컵라면으로 저녁을 때웠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피곤할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오늘 내가 한 행동은 고작 짐을 들고 기차를 오르내리는 것이 다였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피곤할 수가 없다. 한끼도 걸러선 안된다는 굳은 신념때문에 밥은 먹었지만 아직 내 정신은 루체른까지 오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그 정신을 찾아 내가 먼저 나섰다.


민박집에서 나와 3분이면 호수에 닿는다. 간단히 집 주변 호수에서 산책이나 하자는 심정으로 나왔는데 내 마음은 호수에 빠져버렸나 보다. 자꾸 호수를 따라 집과는 먼 방향으로 나도 모르게 걸어가게 된다. 그냥 카메라 하나 달랑 들고 나와 지도도 없고, 지갑도 없는데 뭘 믿고 자꾸 걸어가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채웠지만 생각과 행동은 완전 딴판이다.
스위스 하면 알프스가 가장 먼저 떠올랐는데 내가 알고 있던 스위스의 모습에 호수가 더해진다. 평소 조용한 소도시에서 호수 근교에 자리잡고 아침저녁으로 음악이 나오는 이어폰을 끼고 조깅과 산책을 하며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는데 지금이 바로 그 생각이 현실화되는 순간이다. 비록 음악은 없지만 루체른의 소리를 들으며 강 건너를 바라본다.


호수는 갇힌 물, 내 눈에 들어오는 크기만이 호수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 눈을 벗어나 처음과 끝이 보이지도 않는데 이게 호수란다. 우물 안 개구리가 제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느낀다더니 딱 그 짝이다. 아~ 언제쯤 그 우물에서 벗어날 수 있으려나.. 일명 루체른 호수라고 불리기도 하는 피어발트 슈테터 호수(Vierwald-stätter-see)는 카펠교가 있는 로이스강의 근원지이기도 하다. 리기산을 갈 때 이 호수에서 유람선을 타고 가기도 한다. 선박들이 멈춰선 호수는 조금씩 잠에 빠져드는 듯 한데 내 정신은 시간이 지날 수록 더욱 짱짱해 진다. 이탈리아에서 따라오지 못한 정신이 드디어 날 찾아왔나 보다. 호수에 비치는 불빛의 잔영이 그나마 내 친구가 되어 준다.

정신차리고 보니 어느새 루체른 컨벤션 센터 앞까지 왔다. 스위스에 첫 발을 내딛게 한 루체른역이 바로 코앞이다. 버스타고 갔는데 걸어오는 것도 금방이다. 호숫가에선 드문드문하던 사람들이 다 이곳에 몰려있었나 보다. 컨벤션 센터부터 루체른 핵심 여행지가 펼쳐지니 그럴 수 밖에.

<KKL Luzern>


조명과 분수가 잘 어우러져 건물자체가 하나의 예술을 만들어 낸다. 1,840개의 객석을 지닌 세계에서 손꼽히는 콘서트홀과 전시관을 갖추고 있는 곳으로 내부는 가이드 투어도 가능하다. 돌아오기 전날은 무슨 공연을 하는지 컨벤션 센터의 앞마당(?)에서 칵테일 파티를 하고 있었다. 어떤 날은 멋지게 차려입은 신사들과 아름다운 숙녀들이 와인과 칵테일을 들고 자연스럽게 오가는 모습을 보고, 또 어떤 날은 발랄하고 신나는 재즈음악이 울려퍼지는 노천 음악회도 보고... 매일밤 색이 달라지는 곳이다.


이젠 백조들도 잠들기 시작한다. 백조들이 나무 그늘때문에 점박이조가 되어버렸다. 자기 몸뚱이에 머리를 박고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 얘들이 살아있는 건 맞나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아~ 백조들은 저렇게 자는구나. 재밌는 모습이다.


드디어 어둠에 묻힌 카펠교다. 낮엔 수많은 꽃장식으로 둘러져있는 다리가 밤이 되니 붉은 빛으로 치장한다. 이 모습을 사진으로만 얼마나 봐 왔던가. 막연한 상상으로 만들어가던 카펠교가 생생한 모습으로 내 눈 앞에 서 있다. 보고 또 봐도 믿기지 않는 모습이다.  


대낮처럼 오가는 사람은 없어 더 많이, 더 오래 이곳에 머물 수 있어 좋다. 3-4번은 오갔지 싶다. ㅎㅎ 유럽에서 가장 긴 목조다리, 이래뵈도 200m나 된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나는 삐걱삐걱대는 소리가 정스럽다. 14세기 초에 만들어진 카펠교는 교통로와 적을 막는 방위, 2가지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단다. 안타깝게도 지금 다리는 그 때의 다리가 아니다. 1993년 화재로 일부만 남기고 모두 불에 타버렸는데 루체른 시민들이 다리가 다시 새워지기를 바래 다음해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불타오르는 카펠교를 지켜봐야했던 루체른 시민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마도 무너져 내리는 숭례문을 보면서 가슴을 쓸어내야 했던, 꼬박 밤을 지새워야 했던 우리의 마음과 같지 않았을까 싶다. 괜스레 감정이입이 되어 두발이 멈춰버렸다.


스위스 사람들은 자국의 국기를 아주 자랑스러워 하는 것 같다. 집집마다 국기가 1년 365일 걸려있는 경우가 많고, 상점들도 이렇게 국기를 장식해둔 곳이 많다. 창 밖에서 바라보며 태극기가 장식된 집들과 상점을 상상해보니 어색함에 웃음만 나온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심히 궁금해진다. 아~ 스위스의 상징, 젖소도 볼 수록 좋아진다.


더 시간을 보내면 집까지 찾아가기가 진짜 힘들어질 것 같다. 지갑도 없어 버스를 탈 수도 없고, 올땐 무작정 아무생각 없이 걸어왔기 때문에 돌아갈 땐 그 기억을 되살려야 하는 숙제까지 남아있다. 올때처럼 사람들이 없다는 걸 감안하면 아무리 치안이 안전하다해도 익숙하지 않는 환경에선 두려움이 없을 수가 없다. 그래서 다시 어두운 길을 통해 집으로 간다. 주먹을 꽉~ 쥐고... 하하! 나 이렇게 겁쟁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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