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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이야기(Korea)/강원도(Gangwondo)

강원도 영월이 자랑하는 여행지 한반도 지형 & 청령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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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한반도 지형

 

 

환상적인 풍경에 볼거리 많고, 시원한 강원도는 멋진 여행지지만 거리상의 이유로 자주, 쉽게 가지 못하는 곳이다.

큰 맘먹고, 작정해야 가는 곳이지만 때론 이렇게 즉흥여행으로 다녀오는 것도 솔솔한 재미가 있다. 한반도 지형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언덕 위에 있는 전망대로 5-10분 정도 올라가야 한다.

 

'한반도 지형'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곳엔 오전부터 사람들이 가득했다. 가족, 친구, 단체 여행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즐거운 표정으로 기념촬영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한반도 지형이라고 이름 붙은 곳은 많았지만 특히 이곳은 평소 너무나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인터넷에서 사진으로만 보던 영월 '한반도 지형'을 처음 본 순간... '와~! 진짜 한국지형을 닮았다' 했다.

사실 영월여행의 1순위는 아니었지만 영월에 간다면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손꼽았던 곳이다.

 

 

 

워낙에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기도 하지만 사진작가들에게도 인기가 높다는 말이 틀리지 않나보다.

커다란 카메라 가방과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을 보며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서 몇 컷 찍어보지만 결과물은 엄청 다르겠지?

 

 

자연의 힘은 참으로 놀랍다.

억겁의 세월동안 쌓이고, 깎이고를 무한반복하면서 만들어진 곳이다. 절묘하게 닮은 이 지형은 모양만 닮은 것이 아니라 동쪽의 깎아지른 절벽과 서쪽의 완만한 모래사장까지 닮았다 한다. 무궁화와도 잘 어울리는 풍경인데 저 멀리에 있는 시멘트 공장이 계속 눈에 거슬린다.

 

 

 

이 강이 평창강이라는데 한반도 지형을 따라 유람선도 오간다. 놀랍게도 노를 저어 움직이는 탓에 엄청 느리게 흘러간다. 돌아올 땐 빠르게 고고~!

제주도로 맞춰보고 싶었는데 기념사진을 찍느라 놓쳐버렸다. ㅠ

 

 

 

재미난 포즈로 사진을 찍는 아저씨를 보고 나도 따라해도 되겠냐며... 사진 한번 찍어드리고 포즈를 빌렸다.

덕분에 한반도를 내 품에...

 

 

이 독특한 지형 덕분에 주변 마을은 '한반도면'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쓰레기 매립지로 선정되어 없어질 위기에 처했던 곳이 지금은 이름난 여행지가 되었다.

 

 

영월 청령포 단종 유배지

 

 

 

오래 전부터 정말정말 가보고 싶었던 곳, 청령포는 단종의 서글픈 삶이 서린 곳이라 힌반도 지형을 바라볼 때와는 기분이 사뭇 다르다.

남한강이 휘감고 있는 청령포는 강 반대쪽으로 산이 연결되어 있지만 산세가 험해 사람이 오갈 수 없어 강을 건너야만 이동이 가능한 곳이다. 지금도 입산금지 지역이란다.

 

 

입장료 겸 교통비 겸해서 1인당 3,000원을 받는다. 강은 그리 깊지 않게 느껴졌지만 녹조로 인해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강의 폭 또한 그리 넓지 않은데 어쩜 그것이 단종의 마음을 더 아프게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손에 닿을 듯 닿지 않는 저 땅이 얼마나 밟고 싶은 곳이었을까..

 

 

 

 

 

눈 깜짝할 새에 도착한 청령포에는 초가집과 기와집이 있다. 현재의 집은 모두 복원한 것이라는데 초가집은 상궁과 종들이 기거하고, '단종어소'라 불리는 기와집에서 단종이 기거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꽤나 크고 괜찮은 구조로 되어 있어 자칫 오해할 수 있지만 처음부터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고 한다.

 

 

 

둘러보던 중 만난 문화해설사에게서 단종에 대한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12세에 조선의 왕이 된 단종은 욕망이 큰 삼촌들 사이에서 이름 뿐인 왕좌를 지키다가 세조(수양대군)에게 왕좌를 물려주었다. 하늘 아래 두 마리의 용이 있을 수 없듯 왕좌를 내려놓은 단종은 일개 평민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했다. 공주에서 노비로 전락한 누나와 헤어지고, 부인인 정순왕후와도 함께 할 수 없었다. 그 누구도 버려진 왕과 함께할 수 없기에 단종은 혈혈단신으로 청령포로 왔고, 그 해 여름 홍수가 나기 전까지 청령포에서 생활했다. 그러니 궁인들의 보살핌이란 상상할 수 없었고, 항시 군인들의 감시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단종이 17세 때, 지금의 고등학교 1학년 아이들과 같은 때의 일이라니 가슴이 미어지지 않을 수 없다.

여름 홍수로 영월 객사(관풍헌)로 거처를 옮긴 뒤 삼촌이 보낸 어명을 받고자 의관을 갖추고 나왔을 때 누군가의 목졸림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단종의 묘는 서울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조선시대 왕릉으로 남았다(영월 장릉: 단종릉).

 

조선왕조실록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적혀있지만 세조실록에는 '누군가에 의해 목졸려 죽었다'고 적혀있단다. 어쨌든 세조가 사주했다는 사실은 남아있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리 믿고 있다.

 

 

 

작은 전각에는 영조가 내렸다는 '단묘재본부시유지비'가 있고, 아래 돌로 만들어진 경계가 본래 단종이 기거했던 집이 있던 터이다. 이 한채의 집에서 홀로 지냈다. 사실 이곳에서의 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으나 그의 기구한 삶 때문에 더 관심을 받는게 아닌가 싶다.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참 잘 들었다 싶다. 그저 단순히 남아있는 유적지로 남을 수 있었던 곳에서 정말로 단종을 만난 것 같다.

 

 

 

 

담을 넘는 커다란 소나무의 풍채에 놀랐던 그 순간, 또 다른 나무가 있다며 손짓을 한다.

 

 

 

 

700그루가 넘는 거송들 가운데서 그 위엄을 달리하는 소나무가 있었으니 이름하여 '관음송'이다. 천연기념물 349호로 지정되어 있기도 한 이 소나무는 단종이 유배생활을 할 때 자주 찾아와 쉬었던 곳이란다. 두 갈래로 갈라진 곳에 걸터앉아 한참을 울기도 했다는 소나무가 지금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현재 600살 정도 되었을 거라 추정한다.

 

 

▲ 망향탑

 

 

▲ 망향대

 

 

소나무 숲 한쪽 끝에는 낮은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그 곳에는 단종이 세웠다는 망향탑이 남아 있다. 이 넓은 청령포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단종의 흔적이다. 언덕에 올라 한양을 바라보며 남겨두고 온 정순왕후를 생각하며 하나 둘씩 쌓은 것이 지금의 모양이 되었다.

 

다행히 숙종, 영조, 정조에 이르면서 단종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 달라지고 강등되었던 '노산군'에서 '단종'이라는 이름도 얻을 수 있었다.

 

 

망향대와 망향탑을 보고 내려오는 길, 한 아주머니께서 말씀하신다.

"왕의 가족으로 태어난 것이 팔자를 기구하게 만들었네. 에고~ 그냥 평민으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을..."

그 말을 들으니 안타까움이 더 커지는 것 같다. '할아버지 세종의 사랑과 관심을 덜 받았더라면 이렇게 죽진 않았을까?' 역사 속에서 '만약...'이라는 것이 아무 소용없는 것인줄 잘 알지만 그래도 아픈 마음에 한번 떠 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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