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 (31) 썸네일형 리스트형 [나가사키] 외국인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데지마, 신치 차이나타운 이번엔 데지마로 향한다. 17세기 네덜란드 무역관이 있었던 곳, 데지마. 일본에 혁신을 가지고 와 현재의 모습을 이루는데 크게 일조한 서양문물의 양성지 데지마를 바라본다. 그런데 변화를 가지고 온 곳치고는 조금 쓸쓸함도 보이고, 적막함도 보이고... 예전의 그 활발했던 무역의 모습은 지금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데지마(出島) 데지마는 1636년 일본의 유일한 무역항으로 만들어진 인공 섬이다. 218년간 일본의 유일한 해외무역 창구로 사용되었는데 지금은 15분의 1에 해당하는 크기밖에 남지 않았다. 1996년부터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조금씩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원래는 부채꼴 모양으로 만들어졌지만 지금은 나가사키 시내와 바다로 이어지는 수로에 둘러싸여 과거의 흔적만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데지.. [나가사키] 세계를 감동시킨 글로버의 사랑이야기 글로버 주택(Glover's house) 1859년 나가사키시에 무역회사(글로버상회)를 설립한 토마스 글로버(Thomas Blake Glover)의 대저택으로 19세기 서양식 건물의 특징들이 남아있다. 그의 당시 나이는 21세였다고 한다. 글로버는 많은 부분에서 일본에 영향을 미쳤는데 그 중 하나가 이토 히로부미의 영국유학을 지원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젊은이들을 뒤에서 지원하여 메이지 유신이 성공할 수 있는 밑거름을 제공하였다. 또한 조선, 차 등의 무역업을 통해 경제적 발전도 추구했지만 근대과학기술을 도와 현재의 발전된 일본 모습과도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글로버 주택에는 당시 그의 가족이 사용하던 가구와 집기들이 그대로 남아있으며, 당시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나가사키] 외국인의 거리, 미나미야마테(南山手) 언덕의 구라바엔(Glover garden) 오우라 성당을 왼쪽으로 끼고 돌아 올라가면 구라바엔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일본인들의 아기자기한 분위기가 입구부터 물씬 풍긴다. since 1974라는 것은 구라바엔이 만들어진 시기가 아니라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된 시점을 말하는 것 같다. 지난번에도 너무 와보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오지 못했다. 맘 속에 담아놓고 눈길만 계속 이곳으로 향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올 수 있는 기회가 생겨 너무 기쁘다. 나가사키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것, 하나를 꼽으라면 이번엔 구라바엔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미션 수행 완료! ^^ 나를 환영해주는 안내문들... 돈 내라는 소린데도 좋단다. 일본의 웬만한 관광지에선 한글로 된 안내문을 준비하고 있다. 그래서 홀로하는 여행이라 해도, 초행길이라 해도 그다지 큰 어려움은 없다. 내가.. [나가사키] 나가사키 3대 비극을 만나러 가는 길 나가사키는 유독 '3'이라는 숫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 일본 3대 야경 중 하나인 나가사키 야경, 나가사키 3대 명물 그리고 이번엔 나가사키 3대 비극이다. 비극을 찾으러가는 길 치고는 너무나 아름다운 길이다. ☞ 나가사키 3대 명물 보기 유럽식 건물 외관을 한 미술관이다. 독특한 모양의 건물이라 볼 때마다 눈에 들어온다. 길을 따라 올라가면 정면에 오우라 성당이 보인다. 그곳에서 오른쪽으로 살짝 틀면 그라바엔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이 두 가지가 나가사키 3대 비극의 2가지 이다. 마지막 하나는 앞에서 본 나가사키 원자폭탄이다. 다시 말해서 나가사키 3대 비극은 나가사키 원폭, 천주교 탄압, 나비부인의 비극을 말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가지 비극의 끝이 맞닿아 있다. 일본에 와서 가장 갖고 싶었던 것이.. [나가사키] 평화공원 원폭자료관, 평화공원, 평화상이 원자폭탄의 폭심지를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다. 원자폭탄이 터졌을 때 일본인만이 피해를 당한 것은 아니다.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온 우리나라 사람도 꽤 많은 수 희생되었는데 그들을 위한 추모비이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두번의 아픔을 경험한 우리의 조상이다. 이미 히끗히끗 푸른 빛의 잎이 많이 나와있다. 내가 우리나라를 떠날 때 겨울이었는데 이곳은 여름으로 향하고 있는 것 같다. 벚꽃은 언제봐도 나의 기분을 좋게 한다. 하얀 꽃잎에 수줍게 번지는 붉은 빛이 첫사랑을 마주한 한 소녀의 얼굴을 보는 것 같다. 평화공원을 만들어 주변정리를 하면서 원폭이 터졌을 때 당시 이곳의 모습을 요만큼 남겨두었단다. 폭심지... 이 자리 50m상공에서 원자폭탄이 터졌다. 지금은 너무나 깨끗하게.. [나가사키] 다시 찾은 희망의 도시 Nagasaki 상하이를 떠난지 대략 37시간 만에 일본땅에 당도했다. 내가 눈을 떴을 때에도 배는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었으니 참으로 긴 항해를 한 것이다. 그렇게까지 먼 거리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 시간을 지키려 그랬나보다. 창밖으로 보이는 익숙한 모습을 보니 오랜 친구를 만나는 것 같기도 하고, 이번엔 어떤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까 기대가 되기도 한다. 기항지에 도착하면 늘 바뀌는 국기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잊지 않게 해준다. 오늘은 일본이다. 오늘부터 일본이다. 해가 떠오르니 이 작은 항구에도 활력이 생기기 시작한다. 크고 작은 배들이 바다 위에 떠 다니고, 공장 굴뚝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기적소리가 들리고 사람의 움직임이 감지된다. 나도 이제 기지개를 켜고 일어서야 겠다. 크루즈 터미널에 내리니 상하이와.. 크루즈 기항지 컬렉션-상해, 나가사키, 가고시마, 후쿠오카 누군가는 크루즈 여행의 꽃이 새롭고, 다채로운 기항지를 만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더군요. 크루즈 선내에서 만끽할 수 있는 즐거움도 크지만 잠시 멈춰 선 기항지에서 만날 수 있는 광경은 여행에 있어 또 다른 생명력을 부여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한중일 크루즈 기항지 관광] 4월 2일을 시작으로 우리나라를 시작으로 하는 크루즈 여행의 길이 열렸습니다. 한-중-일을 잇는 새로운 바닷길이 지금은 여행의 길로 열렸지만 이를 계기로 하여 더 많은 가능성과 더 큰 관계의 변화를 담아 아시아에 전역에 변화를 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 한-중-일 크루즈의 기항지 관광은 2가지 코스로 운행 중입니다. 전 부산(한)-상해(중)-나가사키(일)-가고시마(일)-후쿠오카(일)-부산(한) 순서의 기항지 관광을 했고, 또 다른 .. [히라도]조개껍데기의 정성이 담긴 타비라 성당 일본에서 마지막 미사를 한 타비라 성당. 빨간 벽돌로 조개껍데기를 구워 만들었단다. 신자 한명 한명의 손길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다. 성당 뒤편에는 신자들의 묘지가 있다. 마을주변의 묘지, 이제는 익숙하지만 그 의미가 좀 남다르다. 박해로 이 지역을 떠나야했던 신자들이 죽어서라도 신부님이 있었던 성당 근처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이 곳에 묻힌 사람들이 많단다. 그리움이 함께 묻힌 곳이다. 떠나기 전 아쉬움을 달래던 전날밤의 여운으로 아침부터 너무 힘이 들어 사진도 별로 없고 있다해도 건질만한게 없다. 조금만 더 힘낼걸... 오래된 성당이라 그런가? 아님 일본의 특징인가? 연달아 목조제대가 있는 곳이다. 사실 어디가 정확한 앞쪽인지 모르겠다. 난 들어간 입구가 앞쪽이라 생각하니... 스테인글라스가 .. [일본 히라도] 란푸호텔 우리가 마지막 휴식을 취한 곳인 란푸호텔의 모습. 호텔의 규모는 엄청 커보였는데 우리가 갔을 땐 그렇게 많은 사람이 묵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호텔의 위치가 너무 외곽지에 있어 그러지 않았나 싶다. 방에서 내다보는 바다의 풍경이 너무 멋있다. 야마다 성당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바람에 앞에 보이는 바다에서 해수욕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시간이 되었다해도 넘 피곤해서 엄두도 못냈을 것 같다. 온천호텔이라기에 첫날처럼 다다미를 기대했는데 침대방이라 조금 실망스러운 것도 있었다. 이날 다다미방은 완전 랜덤이라 재수가 좋은 사람은 다다미방이고, 나머지는 그냥 침대방이었다. 들어가기 전 로비에 있는 호텔안내문을 보고 너무 멋질 것이라 기대했지만 역시 사진의 위력을 그대로 보여줬다. 다르진 않았지만 사진에서.. [히라도] 야마다 성당에서 세번째 미사 전형적인 시골마을 소박한 성당의 모습이다. 이키츠키 출신이면서 16성인 중의 한명인 성 토마스 니시를 기념하여 만든 성당이다. 소박한 모습에 비하면 성당을 세우며 담은 의미는 훨씬 대단한 것이었다. 나가사키 근교 성지순례를 할때 시작점이 되는 곳이기도 하단다. 원래는 벽돌로 만든 성당이었다는데 지금은 그냥 콘트리트 성당이다. 여기에서 조금은 마음아픈 이야기를 들었다. 히라도 영주가 기리시탄에게 가혹한 박해정책을 사용하여 가톨릭 신자들이 잠복 기리시탄이 되는데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잠복 기리시탄으로 남아있다. 지금은 나와도 되는데... 아니, 나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거부한단다. 그래서 지금은 자기들만의 신앙의 양식을 지니고 있다. 왜일까? 지금처럼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는 상황에서 돌아.. 이전 1 2 3 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