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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마을 이야기(Europe)/독일(Germany)

여행에서 만난 독일의 역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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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최대도시 베를린과의 만남은 중앙역에서 시작됐다.

유리로 둘러싸인 베를린 중앙역은 미래를 향해 도약하고자 하는 독일의 염원을 담고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중앙역을 나서는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건물 하나는 중앙역에서 가진 베를린의 이미지를 깡그리 없애버렸다. 활기찬 거리의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폐허 직전의 건물은 밋밋할 것 같았던 베를린 일정에 묘한 기대를 가지게 했다.

 

 

 

 

그래서 베를린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브란덴부르크 문을 찾았다.

뜨거운 태양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가운데 시위하는 사람들의 무리도 보인다. 우리네 시청 광장 같은 느낌?!

 

개선문을 중심으로 파리의 다양성이 뻗어나간다면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에선 화합이 사방으로 펼쳐지는 것 같다. 1730년대, 베를린과 다른 도시를 구분하는 경계를 오가는 18개의 문 중 하나가 브란덴부르크 문의 시초이다. 1788년 "평화의 문"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세워진 이 문은 나폴레옹과 스친 인연으로 권력의 상징으로 변모했다. 좀더 구체적으로 브란덴부르크 문의 퀴드리거(Quadriga)가 그랬다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을 정복하며 전리품으로 가져간 쿼드리거를 8년 후 되찾아 오면서 프랑스에 설욕했고, 이후 프로이센 승리의 상징이 되었다. 물론 더 이상 이전의 퀴드리거가 아니었다. 지금은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가 되었다.

 

 

 

 

 

개선장군의 행렬은 영원하지 못했다. 1·2차 세계대전을 연이어 겪으면서 독일은 패전국이라는 오명을 가지게 되었고, 브란덴부르크 문은 연합군이 차지했다. 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베를린은 동과 서로 나누어졌고, 그 중심에 브란덴부르크 문이 있었다. 브란덴부르크 문을 가진 동독은 그 주변으로 베를린 장벽을 이어 동·서독의 자유로운 이동을 금지했다. 공산주의 체제에 있던 동독 주민들의 삶이 아무래도 더 힘들었을 터, 잦은 탈출 시도는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었고, 베를린 장벽이 사라진 지금은 그들을 기리는 십자가만이 말없이 브란덴부르크 문을 바라보고 있다.

 

브란덴부르크 문의 주변에는 전쟁 전후의 사진을 전시하고, 이 문이 가진 상징적 의미, 역사적 사실들을 설명하고 있다. 나 역시 남·북으로 나뉘어진 나라에 살고 있기에 독일의 통일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대단한 애국자여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이 그러하기에 그들이 밟고 가는 역사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눈여겨 보일 수 밖에 없다. 영원할 것만 같던 베를린 장벽이 힘없이 무너지던 그 날처럼 우리의 "그 날"은 언제쯤 올 수 있을까.

 

 

 

 

동서독을 나누던 베를린 장벽은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다. 사실 실제로 보거나 경험하지 않고, 이야기로 전해 들은 이야기는 큰 힘을 가지지 못한다. 불과 65년 밖에 지나지 않은 한국전쟁이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기사들이 적잖게 나오는 요즘, 독일도 같은 상황이지 않을까 싶다. 현재 베를린 장벽이 있던 자리엔 2줄의 선명한 흔적이 잊어서는 안될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붉은 화살표).

 

통일전망대, 비무장지대, 임진각 등은 어떤 방식으로 통일의 역사가 씌여질지 자못 궁금해진다.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홀로코스트 추모비가 있다.

이유도 모른채 죽어간 500만명이 넘는 유태인들의 넋을 기리고자 만든 이 조형물은 음침해보이는 외형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의 휴식처로 각광받는 듯 했다. 조각상 위에 걸터 앉아 책을 읽는 사람, 지도를 보며 숨을 고르는 사람, 조형물 사이를 오가는 사람, 조용히 담소를 나누는 사람 등... 모습은 달랐지만 이곳을 무척이나 친근하게 느끼는 듯 보였다.

 

 

 

 

 

 

파도가 밀려오듯 굴곡진 콘크리트 조형물은 모두 2711개로 이루어져 있다. 아주 낮은 것부터 내 키를 훨씬 넘어서는 것까지 크기가 가지각색이다. 이 숫자가 의미하는 바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당시 독일에 의해 사망한 유대인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이 평안한 안식을 얻었으면 좋겠다는 기원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인지 조형물 사이를 오갈 때는 작은 말소리 마저 그들의 안식을 방해하는 것 같아 쉬이 나오지 않는다.

 

일본이 역사에 대한 망언을 할 때마다 매스컴은 독일의 역사의식에 대해 말한다. 지난 역사가 잘못한 것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전쟁 피해자에 대해 사죄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측면에서 몇 일전 90세가 넘은 당시 나치군인에 대한 재판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궁금해진다. 이 곳을 오가는 유대인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진정 용서했을까?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흔적만 남아있던 베를린 장벽을 실제로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포츠담 광장 부근과 찰리의 체크 포인트(장벽박물관) 등이 있지만 가장 길고(1.3km)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은 단연 이스트사이드 갤러리(East Side Gallery)이다. 1961년에 세워져 완전히 사라지게 된 1990년까지 약 30년간 동쪽과 서쪽을 나누며 무수한 희생자를 만들어냈던 곳이다. 지금은 희망과 평화를 기원하는 105개의 그림으로 가득히 채워져 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아침뉴스를 통해 들었다. 뉴스에는 별관심이 없는 나이였지만 TV를 통해 보여졌던 영상은 충격일 수 밖에 없었다. 시멘트 벽에 올라가 소리를 지르는 사람, 노래하는 듯 보인 사람, 초를 들고 마구 뛰던 사람, 망치 같은 것을 들고 벽을 내리치는 사람... 지구 어디에선가 엄청난 폭동이 일어난 줄 알았다. 지금, 그 현장에 내가 서 있다니 여러가지 생각이 머리에 가득하다.

 

 

 

 

 

 

각양각색의 그림들이 모두 인상적이지만 이스트사이드 갤러리에서 가장 인기있는 것은 [드미트리 브루벨]의 그림이다. 유명세 덕분인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에리히 호네커의 키스는 반복되는 훼손으로 몸살을 크게 앓는 듯 하다. 2009년에 복원을 했다고 하는데 지금도 낙서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베를린 장벽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 때문에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장애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뚫려진 장벽의 두께에 또 한번 놀랐다. 이렇게 얇은 벽 하나가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힘들게 했다니 말이다. 하긴... 철조망 하나로 훤히 들여다보면서도 서로 인사조차 나눌 수 없는 우리나라도 있지 않나.

 

30년 만에 통일을 이룬 베를린이 조금은 부러워진다. 어찌보면 그들이나 우리나 타의에 의해 갈라서게 되었다는 점은 같지 않은가. 더 늦어지면 "통일"이라는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단 생각도 든다. 그러기 전에 자유로운 이동이라도 되길 바래본다.

 

 

 

 

 

 

독일이 연합군에 패하고, 연합군은 베를린을 둘로 갈랐다. 그리고 갈라진 경계를 지키는 검문소가 몇 군데 있었는데 그 중 지금까지 남아있는 곳이 미국 관할인 찰리 검문소다. 베를린의 동쪽과 서쪽을 오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곳을 지나야 한다. 지금은 단순히 기념사진을 찍으며 즐기는 장소가 되었지만 주변에 전시된 당시의 사진이나 설명들은 온 몸이 오싹하게 만든다. 이 곳을 넘으려다 숨진 사람도 있다.

 

 

 

 

 

 

 

현재 나는 무지 많은 자유를 만끽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라 생각한다.

내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생각하는지에 대한 자유가 없다면 정말이지 너무 괴로운 삶이 될 것 같다. 그렇기에 그때 동독 사람들은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자동차 바닥에 숨어, 그리고 작은 가방에 숨어, 믿을 수 없는 기구에 의지해서라도 서독으로 향하려 했을 것이다.

 

참 재미있는 것은 베를린 장벽의 잔해를 기념품으로 판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 이상의 전쟁이 일어나선 안됨을 보여주는 기념품이라지만 내겐 상술이 더 짙게 보이는 기념품이다.

 

 

 

 

 

미처 둘러보지 못했던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가 생각이 났다. 베를린의 곳곳을 둘러보고 나니 더더욱 이곳을 빼놓아선 안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폭격을 맞아 종탑을 비롯한 교회의 대부분이 무너졌지만 이를 그대로 남겨두기로 결정했다. 물론 옆으로 새로운 교회를 지었다. 구 교회의 모습은 정말 베를린과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이 들지만 또 한편으로는 베를린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도록 해 준다.

 

 

 

 

베를린 사람들은 이곳을 "텅 빈 이빨"이라고 부른단다.

교회의 복구에 대해 수 많은 의견들이 있었지만 공사를 담당했던 한 건축가는 "폐허가 된 교회가 전쟁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견뎌온 고통이라는 것을 이해하길" 바란다며 현재의 모습으로 남겨두었다.

 

 

 

 

 

 

 

이곳 역시 당시 잔해들을 그대로 남겨두었다. 화려했던 모자이크가 떨어져나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그 잔해들을 하나 하나 정성스럽게 모아 두었다. 과거 얼마나 아름다운 곳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어 더 씁쓸한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도 세계평화를 염원하며 작은 초 하나를 켜두었다.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것임을 체감했지만 그 보다 더 크게 와닿은 것은 독일인들이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베를린 전역에 남아있는 유적들은 역사적 과오를 인정하고, 더 이상은 같은 잘못을 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다짐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역사의 한 순간을 그대로 남겨두고 기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본보기로 삼겠다는 그들의 모습은 역사를 가벼이 여기는 요즘 세상에 더 의미있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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