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여행'과 '떠남'은 일종의 공용어였기에 익숙한 공간과 사람을 떠나야만 비로소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그러나 2014년은 케케묵은 나의 고정관념을 깨는 것으로 여행 다이어리를 시작하려 한다. 태어나 한번도 떠난 적이 없는 내 삶의 공간으로의 여행, 그것에 기꺼이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신나게 한바탕 다녀보련다. 더 깊이, 더 많이 알면 지금껏 봐왔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일거란 생각에 설레임마저 든다.
굳은 결심으로 처음 찾은 곳은 <경상감영공원>이다. 고작 5km에 불과한 거리인데도 이곳까지 오는데 20년이 걸렸다. 행정구역상 중구에 해당하긴 하지만 경상감영 인근은 흔히 하는 말로 '죽은 골목'으로 여겨져 정작 대구사람들은 그다지 찾지 않는 곳이었다. 그나마 대구근대골목투어가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늘고 있다는 사실은 반갑기 그지 없다.
경상감영은 대구 도심에서 오래된 역사적 흔적을 찾으라면 몇 안에 꼽히지 않을까 싶다. 신라시대 이후 역사에서 사라졌던 대구가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다시금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1601년(선조 34년), 경상 감영이 대구로 옮겨오면서 경상도의 군사, 행정, 경제의 흐름도 이곳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경상감영의 권위는 공원 입구에 서 있는 '절도사이하개하마'라고 적힌 하마비를 통해 알 수 있다. 종이품 무관인 절도사 이하는 말을 타고 들어올 수 없으니 조심스레 걸어들어오라는 표식이다. 조선 후기 병마절도사가 16명(각 도에 1명) 밖에 없었다하니 이곳 주인만 제외하고 모든 사람이 걸어들어와야 한단 말이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대구읍성의 준공식을 이곳 선화당에서 거행했다고 전해진다. 선화당(宣化堂)은 관찰사의 집무실로 경상감영의 가장 핵심 건물이기도 하다. 현재 경상감영에 있는 건물들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3번의 화재 후 1807년 재건되었다. 1965년까지 경상북도 도청사로 사용되었다고 하니 꽤 오랜 역사를 유지해 왔다. 선화당 뒷편에는 징청각(澄淸閣)이라는 불리는 관찰사의 숙소가 있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징청각이라는 사실이 무색할만큼 쓸쓸한 분위기를 풍긴다.
올해를 여는 제야의 종소리는 국채보상기념공원에 있는 달구벌대종(1998년 제작)을 통해 울려퍼졌지만 예전에만 해도 이곳에서 제야의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내가 꼬마였을 때 딱 1번 가족들과 함께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러 온 기억이 난다. 조금이라도 제대로 보여주려는 마음으로 목마까지 태워주셨던 아빠의 마음을 이젠 조금 이해할 수 있을 듯 한데 보답할 길이 없다는게 안타깝기만 하다.
여전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지만 카메라를 든 여행자들의 모습과 손을 꼭 잡고 거닐고 있는 연인의 모습도 보인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더 활발해진 경상감영의 봄날을 기대해 본다.
▶ 경상감사 순력행차 재연(경상감영공원 및 약령시 일대): 봄, 가을 매주 토요일 오후 1시 30분
▲ 르네상스 양식의 근대건축물(대구유형문화재 제49호)
경상감영공원 서쪽으로 연결된 대구근대역사관은 2011년 개관한 역사 박물관이다. 1932년 조선식산은행으로 지어져 1954년부터 산업은행으로 이용되었다가 근대역사관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개관소식을 듣고 가봐야지 했는데 이제야 찾아오게 된 걸 보면 나의 무심함도 대단하다 싶다.
대구근대역사관으로 들어오는 순간 조선시대를 훌쩍 뛰어 일제강점기로 넘어 왔다. 조선식산은행은 1918년 조선총독부가 설립한 은행이다. 대부분 일본인에 의해 운영되었고, 활발한 자금유통으로 조선최대 금융기관이었으나 광복이후 급감한 자본과 인플레이션으로 상업은행화 되어 한국산업은행의 기초가 되었다. 국내 남아있는 조선식산은행의 건물들이 대부분 근대역사관(강경, 대전, 원주 등)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역사관 내 조선식산은행실에는 당시에 사용되었던 화폐와 통장, 주판, 영수증 등이 전시되어 있다.
역사관 내에서 가장 재미있게 관람한 것은 대구 최초의 대중교통인 '부영버스'를 재연한 영상체험실이다. 14명이 앉을 수 있는 소박한 구조의 버스를 타고 당시의 대구거리를 여행할 수 있다. 대구토박이인 내게도 어색하게 느껴지는 구수한 대구사투리에 흠뻑 빠져있다보면 어느새 종점이다. 총 12대의 버스가 5코스로 나누어 대구사람들의 발이 되어주었다. 여름에는 밤 12시까지 운행되었다는 말이 놀랍기만 하다.
몇 년전 지방 신문에서 대구읍성에 사용되었던 돌들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본 기억이 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오며 나라를 빼앗긴 설움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를 알게되었지만 정작 우리를 아프게 했던 사실은 일본인의 편에 서서 동족의 아픔에 무게를 더한 친일파들의 행적이다. 멀쩡한 대구읍성을 파헤치고 전통건물들을 파괴하는데 선봉한 사람 역시 박중양이라는 당시 대구 관찰사였다. 당시에 파괴된 대구읍성의 돌들은 인근 주택과 시설을 건설하는데 사용되었는데 대구시에서 대구읍성 재건사업을 실시하면서 그것들을 모으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돌이 그 시작이다.
지금은 보수성향이 짙은 도시가 되어버렸지만 과거에만 해도 대구는 국채보상운동, 만세운동, 228 학생운동 등 사회변화의 시작점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새로운 변화를 시작할 수 있는 곳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슬쩍 가져 본다.
대구가 교육의 도시로 불릴 수 있었던 역사적 흐름, 조선시대 부터 전국 3대 장터로 키우며 경제적 성장을 꾀할 수 있었던 사실,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대구로 향한 문인들과 예술인들의 삶 등을 집약적으로 설명해 놓은 곳이다. 당시 사용되었던 물건들은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찢어지고 먼지가 뽀얗게 쌓인 인력거지만 그래서 더 정감가는 모습이다. 대구에도 관광을 위한 일력거가 등장했다고 하던데 한번쯤은 타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역사관 1층 마지막 코스에는 대구와 관련있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코너를 마련하고 있다. 순종황제가 기차를 타고 대구에 들렀던 모습부터 故이병철 회장의 삼성이야기, 박정희 대통령과 대구의 인연, 헬렌켈러와 마를린먼로까지 재미난 에피소드가 기다리고 있다.
근대역사관 2층에서는 기획전시로 대구의 옛 사진 전시와 북성로 거리 재연을 볼 수 있었다. 옛 사진들은 흔히 볼 수 없는 귀한 자료들이라 한참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지금의 모습과 당시의 모습을 비교하며 이렇게 변화될 수 밖에 없었던 아픈 역사를 다시한번 되새겨보게 만든다.
약간은 우울한 마음을 가지고 돌아와야했던 시간이지만 미래를 향한 다짐을 할 수 있기에 아프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문화유산을 어떻게 지켜와야하는지에 대해서도 조금은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여행이 끝나고 나면 왠지 대구를 더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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