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 어딘가에 있을 지명의 이름인줄 알았다.
『에르미타(Ermita)』
알고보니 특정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은둔지', '세상과 떨어진 곳', '사람이 살지 않는 장소' 등을 일컫는 말이라 한다(이 책에서는 '세상에서 떨어져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은 사람들의 은신처'를 의미한다). 특정 지역의 고유명사가 아니라는 말에 이상하게도 안도감이 든다. 만약 한 지역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였다면 그곳만이 유일한 목적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적잖은 실망을 했을 듯 하다.
여행엔 정해진 법이 없기에 누구든 자유롭게 떠날 수 있다지만 '겨울'이라는 계절이 주는 황량함도 만만찮은데 더 깊은 외로움과 고독을 찾아간다니... 그것도 일종의 의식처럼 때가 되면 '에르미타'를 찾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나를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면서도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설원에 첫 발자국을 내딛는 쾌감을 알기에 그들의 여정에 기꺼이 동행하고 싶어졌다.
핀홀 카메라, 삼각대, 사다리, 필름 카세트...
이것이 에르미타를 위한 여정의 동반자가 되어주었다.
그들이 이 고생스러움을 자처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봤다.
"(회색빛)하늘은 내 사진 속에서 에르미타의 감정을 실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야."
이 한마디로 에르미타를 찾는 그들을 조금은 알 듯 하다.
도시의 화려함은 첫 눈에 사람들을 매료시키지만 여운은 그리 오래지 않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연은 첫 눈에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지만 떠난 뒤에도 가슴 속에서 끊임없이 뭔가가 꿈틀거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렇기에 기다릴 줄 아는 사람만이 살아있는(生生) 자연을 만날 수 있고, 그래야지만 자연의 진가를 알 수 있다. 그것이 기다림의 미학이다.
7년간 에르미타를 찾아 길을 떠난 세바스티안은 분명 우리가 보는 것과는 다른 풍광을 보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성공확률을 확신할 수 없는 기약없는 인고의 시간을 참고 견디는 것이다. 때론 "차라리 산을 불질러버리고 싶다는 절망적인 분노가 치미는 순간"도 있지만 황량한 산 속에서 에르미타를 마주하는 순간 분노는 거짓말처럼 편안함과 안정됨으로 변하기에 그 매력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을 것이다.
원하는 에르미타를 찾기 위해 시간을 보내고,
그 곳에서 머물렀을 선인(先人)들의 감정을 담아내기 위해 때를 기다리고,
여정을 끝내고 사진의 실체를 만나기까지의 기다림이 나에게 떨림으로 다가왔다.
문득 내가 보낸 많은 여행의 시간이 내겐 어떤 의미였는지 깊은 생각에 빠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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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수고한 자에게만 그 아름다운 자태를 조용히 드러낸다.
눈은 소리를 내며 내리지 않지만 주위의 모든 소음을 흡수한다.
아름다운 자연 경관은 벅찬 감동을 선사하지만 그 위대함을 깨닫는 순간 나 자신은 지극히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한 생명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얇은 끈을 가지고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삶의 의미라는 것이 그 어느때보다도 명확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인생은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행은 그런 인생의 한 면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이다. 적절한 만남과 헤어짐이 있기에 긴 시간 동안 서로의 마음을 나눌 수 있고 또 짧은 만남의 시간들을 추억하며 살아갈 수 있다. 손에 잡히지 않는 기쁨, 과거를 추억하는 일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을 때도 있지만 사람은 미래를 향한 황홀한 꿈과 또 그만큼 아름다운 추억으로 채색된 과거를 디딤돌 삼아 현재를 진행할 수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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