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의 가장 깊숙한 곳은 후원이 자리하고 있다. 치열하게 흘러가는 역사 속에서 그들은 숨쉴 구멍을 찾아야하지 않았을까. 개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거수 일투족이 공개되어야 하는 삶 속에서 최소한의 자유를 누리고 사생활을 보호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일런지도 모르겠다. 그 비밀의 공간을 엿보고 싶은 마음에 궁궐의 가장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 지금도 본래의 쓰임을 다하고 있는 풍기대(바람의 방향을 측정)
창덕궁 곁에서 보조궁의 역할을 했던 창경궁도 일제시대의 수난을 피해갈 수 없었다. 내전에서 후원으로 넘어가는 길에서 부터 무참히 난도질 당한 창경궁의 모습에 가슴 한켠이 아려온다. 언뜻 보아선 보이지 않는 나무들 사이에서 성종대왕 태실을 만났다. 왕실의 대를 이을 귀한 후손이 태어나면 태반과 탯줄을 태항아리에 담고 명당자리를 찾아 탑을 쌓고 그 아래에 묻는다. 일본인들이 조선에 들어와 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행한 많은 행위들 중 하나가 태실을 옮기는 일이었다. 조선왕조를 흔들고 장악하기 위한 상징적 의미로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을 듯 하다. 경기도 광주에 있던 성종대왕 태실을 창경궁 후원 입구 구석으로 옮겨놓고 이 주변을 마구 훼손해 버렸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혜경궁 홍씨의 거처였던 자경전도 이 때 허물고 도서관으로 바꾸었다(1992년 철거).
잎이 무성한 나무들은 후원의 기나긴 역사를 이야기한다. 건물들은 쓰러지고 불에 타 버렸지만 이곳에 남아있는 나무들은 화를 면하고 지금까지 강건하게 서 있으니 진정 궁을 지킨 주인공은 이녀석들일지도 모르겠다. 묘한 모양의 느티나무와 새하얀 옷을 입고 있는 백송은 과거엔 왕을 만났고, 지금은 우리를 만나고 있다.
100년 전 만들어진 인공연못인 춘당지는 후원의 훼손을 가장 크게 겪은 곳 중 하나이다. 왕이 가진 애민정신은 풍년을 기원하며 내농포와 춘당지를 만들었다. 왕의 소꿉놀이 쯤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이 또한 백성을 향한 마음이 없다면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농사를 지으며 필요한 물을 대는 곳이었던 춘당지는 일본에 의해 뱃놀이를 즐기는 유희의 장소로 변질되어버렸고, 동물원과 식물원이 들어서면서 누구나 들락날락일 수 있는 공원이 되어버렸다. 아마도 일본이 바랐던 바는 왕족과 일반 백성들이 다르지 않다는 인식을 심어 자신들이 원하는 식민지화를 빠르게 진행시키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1911년 벚꽃으로 가득찬 창경원은 1983년에 와서야 창경궁으로 복원되었다. 어릴적 앨범에 창경원으로 불렸던 시절에 가족들과 찍은 사진이 있다. 뭔지도 모르고 웃으며 찍은 사진들을 보며 갖가지 생각이 오간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라는 명분때문인지 대온실(식물원)은 복원사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온전히 살아남았다. 지금 보기엔 그냥 그런 규모이지만 지어질 당시엔 동양최대였다고 한다. 생각보다 관리되지 않는 듯 느껴지는 식물들의 모습에 실망스러움 마저 느껴졌던 곳이지만 조선시대에 지어진 서양식 건물이라는 점에서 눈길은 꽤 오래 머물렀다.
건물의 외관을 살펴보면 지붕을 엮은 용마루에 대한제국의 상징이었던 오얏(자두)꽃 문양이 남아있다. 오얏꽃을 조선왕실의 상징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일본과 관련하여 여러가지 의견들이 분분한 것 같다.
▲ 관덕정
이제 곧 가을이 오면 창경궁 후원에서 가장 인기있는 곳이 될 관덕정이다. 창경궁과 창덕궁을 모두 합하여 최고의 비경을 가진 곳을 꼽으라면 꼭 들어가는 곳이기도 하단다. 울긋불긋 단풍이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곳이라는데... 과거엔 왕이 화살을 쏘던 놀이터였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씨에도 우리 궁을 찾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참 보기 좋고 반가운 것은 다양한 곳에서 찾은 외국인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방문의 해를 비롯하여 민·관의 다양한 노력이 빛을 발하는게 아닐까 싶다. 아직은 미미하지만 세계 어디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매력을 지닌 우리 땅에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즐길 수 있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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