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한양을 찾았다. 한양도 오랜만이지만 우리 궁궐을 찾은 것도 참으로 오랜만인 듯 하다. 서울을 그리 오가면서도 궁궐 한번 제대로 못봤다는 어머니의 푸념(?)때문에 고갱을 버리고 이곳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궁궐을 몇 곳 돌아보니 입구부터 이어지는 건물들의 형태가 어렴풋이 그려진다. 궁의 정문을 들어서면 내(川)가 흐르고 그 위에 걸쳐진 돌다리, 그리고 일직선으로 이어진 정전... 정궁이 아니라지만 궁궐이 갖추고 있는 형식은 그대로이다.
▲ 홍화문(창경궁 정문)과 옥천교
사실 궁을 제대로 둘러보는 것이 처음이라시던 어머니를 생각한다면 경복궁이나 창덕궁으로 향해야겠지만 고갱전을 포기한 만큼 새로운 궁을 봐야겠다는 생각만은 놓을 수 없었다. 다행히 창경궁을 둘러보고 여유가 생긴다면 창덕궁으로 향할 수도 있어 이곳을 목적지로 삼았는데 기대가 없었던 탓인지 보이는 것들이 새롭고 더 크게 다가온다.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은 그다지 크지 않지만 현재 남아있는 궁궐의 대문 중 가장 오래되었단다. 옥천교 아래를 흐르는 물줄기는 유일하게도 진짜 살아있는 물줄기란다. 즉 인공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에 따라 흘러내리는 물이다. 500년 조선왕조와 현재의 대한민국을 이어주는 물줄기라는 느낌이다.
홍화문은 과거 왕과 백성들의 만남의 장소였다고 한다. 일개 백성이 왕을 알현할 수 있는 기회가 그리 많았겠는가. 애민정신이 가득한 너그러운 왕이 친히 홍화문으로 나와 백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었다고 전해진다.
▲ 명정전(창경궁 정전)
소담스러운 창경궁의 전체적인 분위기처럼 정전인 명정전 또한 소박하기 그지없다. 창경궁은 창덕궁의 보조궁 역할로 지어졌다. 당시에도 여성들의 평균수명이 높았나 보다. 한 궁궐에 대비가 3명이나 생활을 하면서 불편함이 커지자 세종대왕이 세운 수강궁을 성종이 확장하여 건설하였다. 원래 정전은 궁에서의 공식행사가 열리는 중심 전각으로 가장 크고 화려하지만(때문에 근정전(경복궁), 인정전(창덕궁)은 2층으로 지어졌다) 창경궁의 그것은 단층으로 단아함이 더 크다. 초기에는 고유한 정전의 역할보다는 과거시험이나 경로잔치, 연회 등이 열렸다.
▲ 용상과 일월도
조선시대 많은 궁들이 임진왜란과 일제시대를 지내오며 불에 소실되거나 파괴되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이어오지 못했다. 하지만 창경궁은 임진왜란에 소실되었으나 광해군 때 재건이 되어 지금까지 내려오는 정전 중 가장 오래된 전각으로 남아 있다.
▲ 숭문당(학문을 논하던 곳)
경복궁과 창덕궁과 달리 창경궁의 전각들은 산등성이가 겹겹이 이어지듯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덕분에 비가 내려도 우산을 켜지 않고 다닐 수 있어 연로한 대비에 대한 배려가 엿보인다. 숭문당은 '유교를 숭상한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영조 친히 편액을 썼다고 전해진다. 창경궁에 원래 없었던 건물로 광해군이 재건하며 지어졌다. 가만히 앉아 전각을 바라보고 있어도 힐링이 되는 듯 하다.
창경궁의 핵심 전각을 거쳐 나가면 숨겨놓은 궁중의 뒤뜰 터에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몇 개의 전각이 있다. 그 중에서 조금 여유로움이 엿보이는 곳이 함인정이다. 주로 대비들이 연회를 베풀었다는데 함인정 주변 공터를 가마의 주차장으로 사용했단다. 그 모습이 참으로 볼 만 했을 것 같다.
▲ 환경전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는 있었지만 대체로 왕과 세자가 기거했던 곳이다. 내부는 들여다 볼 수 없었지만 전해지는 바로는 온돌이 없이 통마루로 바닥이 되어 있다고 한다. 원래 우리 건물들이 가지지 않았던 특징으로 일본에 의해 변형된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사극 <대장금>의 주요무대가 환경전이었다. 최초이자 유일했던 왕의 주치의녀 대장금은 환경전에서 중종의 치료를 전담했고, 중종이 마지막으로 숨을 거둔 곳도 이곳이다.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요즘 한 종편에서 방영되고 있는 <꽃들의 전쟁>에서 소현세자의 배경이 된 곳도 환경전이다. 청나라에서 9년만에 돌아왔지만 그 기쁨을 누리지도 못하고 2달만에 세상을 뜬 소현세자가 마지막으로 죽음을 맞이한 곳이다. 독살설이 끊이지 않고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소현세자 죽음의 비밀이 이곳에 숨겨져 있는 셈이다.
▲ 통명전
궁궐의 가장 깊숙한 곳은 언제나 왕비의 자리였다. 다른 건물들 보다 높은 자리에 위치하며 박석까지 깔려있다. 구중궁궐이 답답해 외로움에 떨 중전을 배려했는지 연못과 돌다리, 작은 뜰까지 이어져 있다. 전각에 용마루가 없다는 사실로 중궁전으로 사용되었음을 추정해볼 수 있지만 때로는 편전으로도 사용되고 다른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한다.
통명전 마루는 올라앉을 수도 있고 내부를 둘러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꽤 많은 사람들이 통명전에서 머무른다. 비가 오는 날씨임에도 외국인 관광객들이 통명전을 세심하게 둘러보는데 괜스레 우쭐해지기도 한다. 마루에 앉아 뒤뜰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을 중전의 모습이 떠오른다. 중전이 사용했던 처소는 이곳 말고도 경춘전과 양화당이 있다.
통명전은 중궁전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많은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대부분의 사극이 궁궐 내 여성들의 암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 않은가. 궁내 여성이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 중 한 사람이 장희빈. 장희빈이 복위된 인현왕후(인현왕후가 기거한 곳은 경춘전이라 전해짐)를 죽이기 위해 굿을 벌이고 저주를 담은 인형과 동물 사체를 묻은 곳이 바로 통명전 주변이라 한다. 지금은 터만 남은 취선당... 불꽃 튀는 전각의 싸움이다.
▲ 언덕에서 내려다 본 통명전
창경궁의 가장 높은 위치인 작은 언덕엔 대비의 침전이었던 자경전 터가 남아있다. 이곳에 서면 창경궁의 모든 모습들을 내려다 볼 수 있다.
창경궁 문정전에서 숨을 거둔 사도세자를 기리며 정조가 혜경궁 홍씨에게 지어준 전각이다. 이곳에선 문정전의 뒤태가 어렴풋이 보이는데 그것보단 사도세자의 사당을 볼 수 있게끔 지었고, 「한중록」이 이곳에서 씌여졌다. 하지만 일제시대에 그 쓰임새가 달리졌고 그 후 철거되었다.
원래는 없었던 계단이 언제부터 인지는 알 수 없지만 궁내 처소들과 후원을 이어주는 길이다. 후원은 왕과 가족들이 거닐며 휴식과 마음의 안정을 얻었을 곳인데 지금 그곳을 둘러보는 우리의 마음은 묵직한 돌이 얹어진 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역사였기에 되새기고 되새겨 미래의 역사를 써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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