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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의 이름 '경운궁' 보다 더 익숙한 이름, '덕수궁'
덕수궁은 실제 궁보다는 돌담길을 걸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큰 곳이다. 그래서인지 궁 내보다 돌담길에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그 돌담길을 너머 어떤 모습을 간직했는지 살펴보련다.
정동에 위치한 경운궁은 일본에 의해 덕수궁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일본은 왜 멀쩡한 이름 '경운궁'을 두고 '덕수궁'이란 이름을 붙였을까?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서 불러난 뒤 태조의 둘째아들 정종이 아버지에게 '오래사시라'는 의미로 '덕수(德壽)'라는 이름을 올렸지만 시간이 흐르며 '왕위에서 물러난 왕(상왕)'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일본은 이런 의미를 가진 이름을 '고종'에게 붙여주며 '덕수궁 전하'라고 불렀고, 순종은 '창덕궁 전하'라고 격하시켜 불렀다. 그러면서 경운궁도 덕수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도 그리 불리고 있는 것이다. 명칭에 대한 논란이 가중되면서 명칭 변경에 대한 민원 제기도 있었지만 작년(2011) '덕수궁이라는 명칭이 일본의 잔재라는 근거가 명확치 않다'라는 이유로 추후 충분한 연구 뒤 이를 결정하기로 했다. 경운궁은 원형은 거의 사라졌고, 몇 채의 건물만이 남아있다(일본인들이 전각을 부수고, 팔고 없애버렸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버려 왕이 기거할 곳이 없어졌을 때 정동 인근에 있는 왕족의 사가(월산대군의 저택)를 빌려 임시 궁으로 사용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경운궁이다. 그 후 아관파천으로 거쳐를 옮기게 된 고종이 다시 경운궁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정식 궁궐이 되었다. 다른 궁들에 비해 규모가 작아보이는데 원래는 그렇지 않았으나(현재의 3배) 주변에 있는 대사관들을 설립하는데 부지를 제공하게 되면서 규모가 많이 축소되었다.
경복궁에는 근정전이 있고, 창덕궁에는 인정전이 있듯이 경운궁에는 정전으로 중화전이 있다. 원래는 2층의 화려한 건물이었지만 1904년 화재가 난 뒤 단층구조로 재건되었다. 원래 중화문까지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나 이도 일제에 의해 허물어졌고, 지금은 허리가 끊어진 상태로 두 건물이 남아있다.
고종은 경운궁의 즉조당에서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를 세우고 황제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비밀리에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한 것이 실패하면서 강제로 폐위되어 이곳에 유배되었다가 생을 마감했다. 어쩔 수 없이 경운궁은 우리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 되어버렸다. 남들에게는 낭만적 공간으로 기억되는 이곳을 걸으면 이유없이 아련함과 쓸쓸함이 느껴졌는데 그 아픔의 흔적이 묻어있어인가 보다.
석조전(石造殿)
우리 유산 중 가장 오래된 신고전주의 석조건물로 1909년 완공되었다. 원래는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는 접견실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졌다가 해방 이후 국립박물관으로도 쓰였고, 지금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된다. 한국전쟁시 석조 구조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으나 재건되었다. 나도 전시회를 보기 위해 이곳을 방문!
※ 경운궁에 대한 주요 내용은 <쏭내관의 재미있는 궁궐기행>을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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