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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이야기(Korea)/가톨릭성지(Catholic place)

[해미성지] 산목숨 그대로 당신께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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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순교성지 입구>

지난 설연휴 멀리 서해안까지 갔다가 찾게 된 해미성지다. 대구에서 서해안까지 가게되는 무척이나 드문 일이기 때문에 한번 갔을 때 그 지역의 보고 싶은 곳들은 둘러보고 와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부터 20여년 전 엄마께서 성지순례를 다녀오시면서 사오신 색색의 묵주알이 내가 가진 해미성지에 대한 모든 것이었다. 다녀오셔서 엄마의 이야기만 듣고, '한번은 가봐야지'했는데 벌써 20년이 가까이 지났다.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사실 이날은 하루 종일 리솜 스파캐슬에서 보낼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미 너무나 많은 사람들로 가득차 있어 여유롭게 온천을 즐길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정을 대폭 수정! 다음날 가기로 했던 성지를 미리 찾게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지체되어 문을 닫으려는 찰나에 도착했고, 맘 좋은 관리 아저씨께서 다시 문을 열어주셨다.

<해미성지 대성당 입구>

해미성지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굉장히 한국적이다. 물론 현대식 건물이긴 하지만 기와지붕을 얹어 한국의 전통적인 맛을 내었고, 대성당 입구의 문도 나무와 철제장식이 잘 어울려 과거 관아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많은 성인들이 순교한 해미읍성과 매치시키기 위한 노력이 아니었을까 혼자 생각해 본다.

<대성당 내부>

대성당 내부는 여느 성당과 다르지 않았지만 은은하게 빛을 내뿜는 스테인글라스가 내 눈에 확~ 들어온다. 유럽 성당들의 스테인글라스가 화려하면서도 강렬하다면 우리네 스테인글라스는 은은하면서도 부드러움을 느낄 수 있다. 분명한 색을 드러낸 유럽의 스테인글라스도 멋지지만 요즘은 이런 스테인글라스에 더 빠져들게 된다. 어제 다녀온 왜관 수도원 대성전의 스테인글라스도 이런 형태였던 것 같다.

<대성당과 소성당의 외관>

스파캐슬에서 출발해서 해미에 도착할즈음 내려앉기 시작한 안개는 이제 한치 앞을 내다보기도 힘들어 졌다. 안타깝게도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이곳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물론 지금의 모습도 알 수 없는 신비감을 주어 좋긴하지만 훤히 개인 하늘과 멀리까지 내다보이는 풍경이 조금은 아쉽다. 뭔가 한꺼플 내 눈을 막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렇구 말고.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님께 바치는 거야."

- 해미 첫 순교자 인언민 마르티노 -

 

<순교기념 전시관>

대성당에서 나가 뒤쪽으로 연결된 길을 가면 순교기념 전시관이 있다. 문이 잠겨 있어 이곳은 보지 못했다. 언제 다시 찾게될지 알 수 없는 터라 문을 열어달라고 할까 고민도 했지만 이렇게라도 볼 수 있는 것에 감사하며 외부만 둘러보았다. 내가 잘 하는 말 "또 가면 되지, 또 오면 되잖아." 라고 하면서 말이다.

<진둠벙>

잠시 해미성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겠다. 한국천주교회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대박해 외에도 여러번의 크고 작은 박해들이 있어왔다. 신유박해가 있기 이전 해미의 첫 순교자 인언민(마르티노)와 이보현(프란치스코)가 있었고, 1866년 병인박해때 이르기 까지 132명의 순교자가 있었다. 외에도 무명 순교자들을 합하면 179명에 이른다. 가톨릭 신자에 대한 탄압은 왕의 뜻을 어겼다는 명분도 있지만 그 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앞으로 이래선 안된다는 일종의 보여주기도 컸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사람을 이렇게 잔인하게 죽일 수 있었을까. 대부분의 순교자들이 그렇지만 해미의 순교자들도 갖은 핍박을 당하며 잔인하게 죽어갔다. 그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 해미읍성과 해미성지, 서문 밖 생매장터, 자리개돌의 원터 등이다. 김대건 신부님의 할아버지 김진후(비오)도 해미읍성에서 순교하였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순교하여 한참동안 밭을 가는 농부들이 시체를 걷어내야만 했다고 한다. 한국교회에서 유일하게 생매장 순교터와 유해가 확인 발굴되고 보존된 곳이다.

<해미 관련 성화, 조창원 작, 2008>
그림출처: 굿뉴스 성지/사적지 앨범(http://www.info.catholic.or.kr)
해미 수장(좌) / 해미 연못에 수장당한 신자들(우)

 

<진둠벙 앞 십자가의 길>

진둠벙은 천주교인들을 생매장시키는 방법으로 개울 한 가운데 둠벙(웅덩이)에 죄인들을 묶어 물에 빠뜨린 것을 말한다. 원래는 죄인 둠벙이라 불렸다는데 지금은 진둠벙이라고 불린다. 손과 발이 묶여있었으니 그들은 자기 목숨을 위해 아무런 노력도 못해보고 그대로 주님께로 향했을 것이다.


<판화조각과 순교현양 분수탑>

십자가의 길 각 처마다 이곳 순교의 역사를 석판화로 표현하였다. 그 그림의 형태가 한국식이니 더욱 강하게 그 의미가 전달되는 듯 하다. 진둠벙에 빠지는 모습부터 자리개질 당하는 모습까지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


<무명 순교자의 묘와 야외제대>

예전 엄마께서 이곳을 찾았을 때에는 이렇게 정돈된 모습이 아니었다고 한다. 교회에서도 최근들어 성지보존을 위해 많은 노력들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해미성지도 오래 전부터 신자들의 작은 정성을 모아왔고, 그 결과 이렇게 멋진 성지를 만들었다. 덕분에 이곳을 찾는 우리 후손들은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더불어 추억도 쌓아갈 수 있게 되었다. 성당을 가고 싶어도, 기도를 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많이 들어왔지만 그저 한 귀로 흘렸던 것이 한 두번이 아니다. 그래도 이런 성지에 드를때면 다시 한번 더 선조들의 희생에 감사할 수 있게 되고, 나의 신앙도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자리개질 돌판>

해미에서 있었던 순교방식의 다른 하나로 자리개질이라는 방법이 있는데 돌다리 위에서 죄수의 팔다리를 들어 잡아 메어치는 방식이란다. 순교자가 많은 때는 한꺼번에 눕혀놓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번에 죽이기도 했다고 하는데 도대체 누가 이런 방식들을 찾아내는 것인지, 인간의 잔인함은 끝이 없는 것 같다. 그래도 죽지 않았을 때엔 불로 눈알을 지졌다고 하는데 어쩌면 순교자들에게 한번에 죽는 것도 큰 복이 아닌가 싶다.
원래 자리개돌은 서문 밖에 있었는데 1956년 서산성당에 보관되어 있다가 1986년에 제자리로 갔다가 그 자리에 도로가 생기는 바람에 다시 이곳으로 2009년에 옮겨졌다고 한다. 원래 터에는 모조품이 있고, 진품은 지금 여기에 있다.

<조창원 작; 해미자리개질학살, 굿뉴스>


<이름 없는 집>

성지 출구에 있는 이름 없는 집, 아마도 이름도 없이 죽어간 많은 순교자들의 넋이 이곳에서라도 쉬어가라고 만들어 둔 것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하늘에서 편히 쉬고 있겠지만 그 옛날이 그리워 이곳을 찾는 그들의 넋이라도 그 곳에서 쉬어갈 수 있도록, 그리고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손들의 모습을 보며 이제는 즐거워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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