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의 첫 날, 하동 평사리 마을을 찾았다. 3년 전 이곳에 왔을 때 한번 쯤 더 찾을 만한 곳이란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다시 오게 될 줄 몰랐다.
[글쓰기 모임]이란 이름으로 1년을 넘게 만난 친구들이 <토지>를 완독해보자 제안을 했고, 혼자는 힘들지만 함께하면 해낼수도 있겠단 생각에 그 어마어마한 소설을 손에 들었다. 소설을 읽을수록 이 곳이 떠올랐고, 결국 친구들과 함께 다시 평사리를 찾았다.
평사리는 가을을 맞을 준비로 부산스러웠다. 평사리 마을의 넓은 들판은 노랗게 물들어 가고, 집집마다 옥수수, 수세미, 호박 등 풍성한 가을이 맺혀 간다. 용이네, 칠성이네를 지나 최참판댁으로 향한다.
▲ 서희와 길상이 나무
경사가 완만한 언덕을 올라가면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나무가 나온다. 언덕 아래로 노랗게 물든 평야가 펼쳐지고, 일명 서희와 길상이 나무가 우뚝 서 있다. <토지>에 따르면 평사리에선 최참판댁의 땅을 밟지 않으면 마을을 다니기 힘들다 했다. 심지어 주인인 최치수는 한 해 거둬들이는 곡식이 얼마인지도 모른다 했다(이유야 다양하지만).
이 언덕에서 내려다 보는 평사리 평야... 서희에겐 눈물의 평야일지도 모르겠다.
평야를 내려다보고 있을 즈음 가슴을 두드리는 울림이 시작됐다. 서둘러 최참판댁으로 들어가보니 어린 놀이꾼들이 한 판 신나게 놀고 있다. 앳되 보이는 인상과는 다르게 악기를 가지고 노는 폼새는 노련함으로 똘똘 뭉쳤다. 한편으론 옛것을 지켜가는 모습이 대견스럽기도 하다.
쉽게 접할 수 없어서 그렇지 한번 접해보면 참 흥겹고 재미난 것이 우리네 놀이판인데... 덕분에 추석스럽게 연휴의 시작을 열었다.
정말 잘한다 생각했는데 전국 국악경연대회를 휩쓴 경력을 가진 놀이패였다. 무거운 북을 들고, 상모까지 멋들어지게 돌리는 모습이라니...
감탄에 또 감탄이다. 무료공연이지만 그들의 열연에 감사를 표하는 방법이 재미나다.
주인공 최치수가 기거했던 사랑채!
분노만 삭히고 있기엔 너무나 아름다웠던 사랑채다. 만약 채치수가 분노가 아닌 다른 것으로 자신을 채웠다면 그의 가족들과 이 마을 사람들의 삶이 달라졌을까? 사람이 살아가는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그래도 한번 상상해 본다.
사랑채에선 아랫 동네가 훤히 들여다보이는데 안채와 별당은 겹겹히 둘러싸인 담장으로 오직 하늘만 우러러볼 수 있다.
서희의 어머니였던 별당아씨가 머물다 후에 서희가 머물렀던 별당이다. 정원이 아름다운 별당이지만 <토지>의 이야기 때문인지 적막함이 풍긴다. 마루에 앉아 작은 연못을 바라보고 있으면 뛰어노는 어린시절의 서희와 봉순이가 떠오른다. 차마 다가서지 못하고 문 밖에서 바라보고만 있었을 길상이의 모습도 보이는 듯 하다.
가장 구석에 있었던 초당을 지나치면 대나무 숲길이 나온다. 대나무들이 사각사각 속삭이는 소리가 정스럽게 들려온다.
지난번 한옥 체험관인줄 알고 지나쳤던 이곳이 바로 박경리 문학관이었다.
이곳을 드른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은 큰 의미가 있었다. '오직 작품으로만 말한다'는 박경리 작가를 만나러 이곳까지 왔다.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자타공인 그녀의 대표작은 <토지>이다. 토지의 첫 장을 펼치며 '서문'을 읽고 질려버렸다. 당신 스스로 '징하다'고 표현하셨지만 서문 만으로도 '징하다 못해 질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 담긴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한장 한장에 꾹꾹 눌러쓴 원고지를 보니 더 기겁하겠다. 25년간 <토지>에 쏟아부은 정성과 노력, 고집스럽게 지켜온 자기관, 스스로를 고독에 빠뜨리면서도 결코 놓치지 않은 인간애.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왔을까 궁금하기만 하다. 결연한 심지와 대비되는 귀여운 글씨체 또한 인상적이다.
<토지> 등장인물들이 그려진 벽화를 보며 한참동안 이야기 꽃을 피웠다. 인물을 보고 누구인지 맞춰보는 것도 재미있었고, 서로 가장 맘에 남는 인물, 그들의 삶을 이야기했다.
"원고지에 쓸 때마다 글자가 도망가는 것을 느낀다."
감히 그 분의 고통을 다 안다 할 수 없지만 작가로서 얼마나 큰 고통에 빠져 계셨을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생전에 사용하셨던 물건들과 과거 사진들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옛 사진들을 보면 진정 여장부의 아우라가 터져 나온다. 이 사진이 너무 맘에 들어 한참을 바라봤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된 오늘, '내 작품은 성냥 한 개피 만큼의 무게를 가졌는가?'라고 되뇌였던 한 작가의 작품과 생을 다시금 되뇌어 본다. 이렇게 고뇌하는 작가들이 있었고, 그들의 작품을 읽어가는 사람들이 있는 한 언젠가는 우리 땅에서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나오리라 믿는다.
가을날 의미있는 산책을 원하시는 분들은 토지문학제를 찾아보는 것도 의미있을 듯 하다.
2017 토지문학제
2017. 10. 14(토) - 10. 15(일)
최참판댁 일원
전국 허수아비 콘테스트
2017. 9. 30(토) - 10. 15(일)
악양면 평사리 일대
▶ 봄날 평사리 여행: http://kimminsoo.org/918
'우리 마을 이야기(Korea) > 경상도(Gyeongsangdo)' 카테고리의 다른 글
힘들지만 짜릿했던 생애 최초의 서핑 강습, 포항 서프홀릭(surfholic) (0) | 2022.08.15 |
---|---|
내년을 기약하며, 경주 첨성대 핑크뮬리 안녕! (2) | 2017.11.03 |
400년 은행나무가 한껏 멋을 더한 도동서원 (2) | 2016.11.02 |
해바라기에 실망하고, 연꽃에 위로받은 함안 나들이(연꽃테마파크) (2) | 2016.07.29 |
가족사진 찍기 좋은 곳, 청도 프로방스 포토랜드 (2) | 2016.06.28 |